황상철
국제뉴스팀장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을 보면서 세속적인 평판의 위험성을 새삼 느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때문이다. 트럼프의 9월 이후 지지율만 보더라도 41%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그 배경에는 사회경제적·인종적 토대가 있겠지만 ‘트럼프는 원래 그런 인간인데, 뭘?’ 하는 유권자들의 태도가 트럼프의 철벽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이런 인식은 당사자를 욕되게 하는 것인데, 트럼프한테는 되레 든든한 자산이다.
트럼프는 참전 군인을 비하하며 미국의 금기를 깨뜨렸고, 대선 후보 간 텔레비전 토론회에서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추잡하다”고 했다.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성이 10명을 넘어섰다. 납세 내역도 공개하지 않는다. 만약, 트럼프가 아니고 여느 ‘정상적인’ 대선 후보가 그런 말과 행동을 했다면 한 방에 훅 갔을 법한 스캔들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트럼프다. 성인군자로 보이던 사람이 몹쓸 짓을 했을 땐 큰 충격을 주는데, 몹쓸 사람이 몹쓸 짓을 하면 으레 그러려니 한다. 트럼프의 최대 정치적 자산이 바로 ‘원래 그런 인간인데, 뭘?’ 하는 유권자들의 낮은 기대감인 듯하다. 기대치가 낮으면 비판의 칼날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언론도 여느 대선 후보들한테 들이댔던 것과 같은 엄격한 잣대를 트럼프한테는 들이대지 않았다. 막말도 자주 듣다 보니 귀에 익숙해져 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그런 혜택을 좀 누린 것 같다. 빌 클린턴이 대선 후보로 나선 1992년에는 그와 12년 동안 성관계를 맺었다는 제니퍼 플라워스의 폭로가 있었고, 폴라 존스는 성추행을 당했다며 그를 고소했다. 그는 ‘바람둥이’ 대통령으로 찍혔다. 그러던 1998년 8월, 백악관 인턴 직원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지퍼 게이트’로 탄핵 위기에까지 몰렸다. 하원에선 탄핵안이 통과됐으나 상원에서 부결돼 빌 클린턴은 가까스로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실토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고 오바마는 그날로 끝장이다. 그러나 빌 클린턴은 ‘원래’ 바람둥이였다.
미국 대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지지율 격차는 좁혀졌다. 만약, 만약,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의 주요 언론들과 지식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지?’ 하며 정신적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갖게 된 트럼프에 대한 낮은 기대치가 초래한 파국을 뒤늦게 깨닫고 반성문을 쓸지 모른다.
한국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정권은 초창기부터 위장전입 등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고 자질이 부족한 인물들만 정부 고위직으로 쏙쏙 뽑는 현란한 ‘신공’을 선보였다. 우리는 일찍 눈이 멀었고 도덕감은 마비돼 버렸다. 이명박 정권을 거친 영향도 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와 같은 책임을 묻지 못했다. 언론은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지도 않았다. 물론, 이성적 비판까지 나 몰라라 한 이 정권의 무도함에 자포자기한 측면도 있다. 그래도 국무회의가 ‘어명’을 받아쓰기만 하는 ‘어전회의’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조차 ‘민주정’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은 못 했다. 그렇게 이 정권은 무려 44개월 동안이나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언론의 책임이 크다.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봐줘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