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 새삼 관심을 가져야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개나리가 피어 있는 시간이다. 이 나무 꽃은 이틀이 못 가 곧 잎으로 변한다. 믿을 수 없이 빨리 진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젊은 시절도 짧다. 영원할 것 같던 시절은 “어느덧…”, “뭐 했나…”를 생각하는 시간으로 변하고 “안 아픈 곳이 없다”, “허무”를 남발하게 된다.
나이와 욕망, 사회적 지위가 일치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흔셋에 미국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젊지만, 대학교수의 마흔세 살 조교는 그렇지 않다”(105쪽) 이 구절을 읽고 나는 조용해졌다. 여러 상대에게 무릎을 꿇는다. 인생 자체, 몸, 사회, 폭력… 이들의 속물성은 옳다. 케네디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세 살의 조교”보다 늙었으며, 무엇보다 제힘에 부치는 일 혹은 그런 일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교보다 케네디와 동일시하며 나이 듦을 욕보인다. 지혜와 성숙을 내세우는 이도 있지만 거짓말이다. 이것은 개인의 차이지 나이 듦과 무관하다. 나이와 저절로 연결되는 인간 본성은 체력밖에 없다.
자살을 <자유죽음>으로 명명한 장 아메리의 그보다 더 깊은 책, <늙어감에 대하여>(<00DC>ber das Altern: Revolte und Resignation, 1968)는 나이 듦을 직시한다. 이렇게 객관적일 수가. “곱게 늙자”거나 위안은 없다.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부제) 방황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무의미 앞에 세운다.
장 아메리(1912~1978), 아프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이름(본명이 아니다). 죽음(삶)을 사유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빅터 프랭클,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를 순서대로 읽거나 역순으로 읽는 것이다. 물론 나는 장 아메리다. 유능한 번역자(김희상)의 표현으로는 “정갈한 인생”을 살았다. 유태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전 생애를 추방과 투쟁, 수용소 생활, 고문, 글쓰기로만 보냈다. 그는 예순여섯에 고향으로 돌아와 한적한 호텔방에서 수면제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리(整理)한다’는 말이 좋다. 인생을 정리할 때란 평균수명 즈음이나 죽을병에 걸렸을 때가 아니다. 각자 알아서 정하고 정리하면 된다.
자본주의와 의료 기술의 발달은 가난한 사람에겐 모순이다. 일하는 시간은 짧아졌고 평균수명은 길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있어 보이는 옷, 품위 있는 취미, 식생활…. 결국 돈은 이전 세대, 부모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이런 세습 사회가 있었던가.
타인의 시선은 사회적 연령(97쪽)이자 곧 나의 시선이다. 자신에게는 “이 나이 되도록”, 타인에게는 “저 나이가 되도록”. 상호 혐오 사회다. 아메리의 주장은 <자유죽음>과 마찬가지로 삶, 젊음, 나이 듦을 존중하지 않는다. 죽어가며 살아간다는 진실. 단순하다.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일 뿐이고 늙음은 절대 운명이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홀로 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권한다.
발광에 가까운 저항을 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체념이 덜 외롭다는 사실을. 삶은 생물학인 것만도 사회학인 것만도 아니다. 두 가지는 서로를 반영하면서 저항과 체념을 반복한다. 계급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대한 시선은 매우 차별적이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평등한 죽음이나마 평등하게 누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요즘 열심히 살고 있다. 이룬 것이 없어서, 여행도 연애도 안 해봐서(미국도 안 가봤다),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친구들과 달리 안경 없는 생활을 자랑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예전이란 예전이 아닐 때에만 절실하게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때는 몰랐다”. 이 책은 나이 듦을 느끼는 독자들에겐 쉽고 깊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론 “이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할 젊은이들은 없을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