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강의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두 가지. “140자 이상을 쓰고 싶다”와 “고전을 다이제스트(요약본)로 읽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다. “줄거리를 아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요?” 독서, 특히 어린 시절의 책읽기는 활자를 견디는 훈육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잡문’과 ‘논설’, ‘예술’의 위계는 누그러졌고 ‘댓글’이 여론이 된 지금, ‘말과 글’은 더욱 논쟁적인 영역이 되어야 한다.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베니스에서 죽다>(2003)에는 11편의 눈부신(빛나지만 반사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 메모가 빼곡하다. 그중 “섬진강”에서 한 구절을 골랐다. “섬진강”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광주항쟁을 화두로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작가다. 작품의 주인공은 1년 6개월간 광주에 대한 장편을 탈고한 후 섬진강, 피아골 일대를 여행한다. “섬진강”을 충분히 즐기려면 그의 작품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과 동행하는 것이 좋다.
나는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지만 그의 작품 26권을 갖고 있다. 공저도 거의 없다. 내게 정찬은, 숲 속을 걷다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는 세상 같다. 그의 활자들은 칼춤을 춘다. 어렵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치열함을 견뎌야 한다. “어떤 선배 작가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진저리를 쳤다고 했다. 독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의 정신 속에는 독자를 위한 공간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 자신이 유일한 독자였다.”(309쪽)
“어떤 선배 작가”의 지적에 공감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진저리’라는 우리말은 냉기나 공포가 몸에 닿을 때 몸짓, 강한 거부, 몹시 싫증나거나 귀찮은 상태를 잘 표현하는 음이 좋은 단어다. 겨울 거리에 나선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물대포.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그런 진저리다.
한편 ‘진저리’에는 감동으로 인한 쾌감, 충격, 전율이라는 뜻도 있다. 현대사회의 가장 흔한 착각 중의 하나가 대중성이라는 관념이다. 덩달아 대중적이라는 말도 남발된다. 대중(大衆)은 형태 없는 덩어리로,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다. 읽는 고통(진저리)을 주는 글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재미없다는 생각은 오해이고 모순이다. 독자를 배려하는? 이런 표현 역시 있을 수 없다. 어떤 독자를 배려한다는 것인가. 모든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는 불가능하거나 사기다.
나는 잇몸에서 분리된 치아가 입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10개가 넘는 임플란트를 한 그가 고통에 진저리 쳤음은 물론이다. 진저리는 몸이 해체되기 시작할 때 뼈와 근육 간의 연결이 이탈(disarticulation)되기 전단계의 몸이다. 진저리의 최후는 몸과 영혼의 분리, 죽음이다. 진저리 치는 글을 쓰는 작가는 여러 번 죽었다 깨어난다. “작가 자신이 유일한 독자”인 시간은 자기 몸과 싸움 중인 유사 죽음의 상태다. 그렇게 만들어진 독창(獨唱)이 어찌 편안히 들리겠는가.
독자 역시 최소한의 비슷한 경험, 진저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여성학 책을 읽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나는 정찬을 읽을 때 진저리(두통, 구토, 탈진…)를 넘어 원망(怨望)과 질투가 뒤섞인 폭력적인 인간이 된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저리의 폭(幅)만큼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초라하다. 이 깨달음을 표현할 나의 말은 더욱 초라하다. 희미한 흔적, 방향 상실, 잡히지 않는 마음. 이 초라함을 어찌할까. 더구나 나이 들어서.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