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비탈에 누운 무덤들도 돌아보는 돌 하나가 있다. 정으로 아무리 쪼아도 파이지 않는 돌이 있으니 흰 비다. 돌이 희어서 백비가 아니라 글이 비어서 흰 돌이다. 동락천 약수터 근처,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돌이다. 죽산조봉암선생지묘. 죽산은 선 채로 죽어 여기 아홉 글자로 꼿꼿이 서 있다. 검은 묘지석 뒷면은 아직 비어 있다.
조봉암 처형(1958년) 뒤 가솔들은 무덤을 쌓고 비를 세우되 내력을 기록하지 않아 천추에 서릴 한을 민무늬로 남겼다. 문자로 차마 쓰지 못한 글귀들은 오십팔년째 침묵으로 항변하고 있다. 돌의 주인은 2011년에야 죄가 없다고 판결받았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시퍼렇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백비는 글자로는 뜻에 미치기 어렵다.
죽어 운구할 형편이 못 되었던 빈한한 관료의 무덤 앞에 세울 돌을 서해 바닷가에서 골라 보내고도 비문을 새기지 못하게 한 이는 명종이다. 글자로 드러내 청백함에 오히려 누를 끼칠까 봐서였다. 갈재 남쪽 장성에 있는 박수량의 이름난 백비다. 봉건왕조는 문자로 쓰지 않음으로써 묵언의 향기로 사대부들에게 통치윤리를 훈육하고자 했다. 백비로서야 본새 좋지만 원통한 백비와는 그 흰빛과 결이 확연히 다르다.
글자가 박혀 있지만 백비라고 해도 좋을 빗돌도 있다. 제주 섯알오름 밑 정뜨르 비행장 끝 탄약고 자리에는 한날한시에 죽었으나 제때 수습하지 못한 132명의 뼈와 죽음과 비통함이 한데 섞여 후손이 하나가 되고 만 백조일손지묘다. 집단학살 일곱 해 뒤(1956년) 뒤엉킨 뼈들을 모으고 돌을 세웠으나 5·16 쿠데타 직후 빗돌은 동강 난 채 땅에 묻혔다. 죽은 자들의 죽음과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을 다시금 처형하여 매장한 것이다. 흰 칠을 한 가느다란 세로 비목에 먹으로 비문을 써넣고 가까스로 버티던 자리에 새로 비석이 들어선 건 거의 마흔 해가 지난 뒤(1993년)였다. 묘지 한쪽 유리관에 담아놓은 깨어진 빗돌 조각은 여전히 이들의 죽음이 징벌중이라는 돌의 신음소리다. 거창양민학살사건 빗돌도 운명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뼈로 쌓아올린 백비들이다.
베트남에는 한국군 학살 증오비가 적어도 50개 이상 산재한다. 하미마을 위령비에 씌어 있길, ‘어느 날 천둥이 치더니 한국군이 들어와서…민간인들의 머리가 야자열매처럼 떨어지고 살점이 모래와 엉켜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이 자신들을 세 번 죽였다고 말한다. 먼저 집단학살로, 이어서 죽은 이들을 불도저로 밀었고, 마지막으로 비문을 지워서 정신을 죽였다. 한국 측에서 학살 주체를 지워달라고 요구해와서 결국 비문 위에 연꽃 문양 대리석을 덧씌워야 했던 까닭이다. 한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백비가 아닐 수 없다.
킬링 필드는 그 인도차이나가 아니라 한국 땅이 먼저였다. 한국전쟁 동안 대략 100여만명의 민간인이 영문 모른 채 스러져 갔다. 동아시아에서 집단학살 경로는 만주항일투쟁세력 소탕, 남경학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진다고들 하지만 근대 무기로 대량학살을 자행한 시초는 동학군을 토벌한 일본군과 관군이었다. 아시아 대륙에서 처음 기관총(개틀링)이 동원된 학살이었다. 이 경험은 20세기 내내 동아시아를 관류하면서 거대한 죽음을 답습한다.

비문은 문학이다. 글자 없는 흰 비석은 쓰지 않은 것으로서 저항이자 고도의 기록문학이다. 이 문자 없는 문학은 오직 문자로 기록함으로써만 넘어설 수 있다. 집단학살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군 베트남전쟁 참전 50주년인 올해가 지나기 전에 그 연꽃 문양 대리석 가리개를 떼어내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비 내리는 가을날 흰 빗돌들 사이를 서성인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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