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한국 경제는 약 20년 주기로 세번의 큰 위기를 겪었다. 1960년대 후반엔 미국의 원조 감축이 배경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위기는 박정희 정부 시절 공격적인 중화학공업 투자와 제2차 석유파동이 맞물렸다. 1997년 말엔 대기업의 중복·과잉 투자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에 뿌리를 둔 ‘외환위기’를 겪었다. 지금 또 한번 위기의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한국의 경제정책을 이끌어가는 핵심 이념은 여전히 ‘수출 성장’이다. 표현을 어찌 포장하든, 지난주 정부가 내놓은 수출 대책에도 그런 사고방식이 짙게 배어 있다. 수출성장을 떠받쳐온 ‘세개의 화살’이 있다. 시장 개방, 낮은 법인세, 낮은 원화가치다. 모두 수출 대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이었다. 더는 그것들을 쓸 여력이 희박한데, 다른 카드도 없다는 게 위기의 뿌리다. 정부는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에 가서명하면서 ‘경제영토’란 표현을 썼다. 중국과 협정으로 우리 경제영토가 세계 3위인 73.2%로 커졌다는 것이다. 우습고 슬펐다. 칠레와 페루를 따라잡자는 것인가? 개방 확대로 세계 교역량이 늘어나는 동안, 수출주도 정책이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이 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상호 관세 철폐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에는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제주체들에게는 고통을 요구하는 양면성이 있다. 오직 장점만 본다고 해도, 경쟁국이 아껴둔 카드를 우리는 이제 거의 다 써버렸다. 역대 정부는 대기업을 위해 법인세를 완화하는 정책을 계속 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보다 법인세 실효세율이 낮은 나라는 한손에 꼽힌다. 특히 2009년부터 더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각종 감면 제도 덕에 거대기업의 실효세율이 중견기업보다 낮다. 그 영향으로 나랏빚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제 더 낮춰서 기업의 가격 경쟁력에 보탬을 줄 수 없다. 소득세 실효세율도 워낙 낮으니 법인세만 올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법인세도 올려야 할 판이다. 한국은 대외신인도가 낮아, 경제력에 견줘 원화가치는 약했다. 수출 경쟁국인 일본의 엔화가 오랜 기간 강세여서 그 덕도 많이 봤다. 원화가치가 조금 오르면 기업들은 아우성을 치곤 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외환시장에 개입해 원화가치를 떨어뜨렸다가 큰 손실을 보고, 그 후폭풍으로 원화가치가 급등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에게 물가상승을 떠안기고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원화 약세 유도는 불가능하다. 물가상승이 겁날 것 없는 일본은 무지막지하게 돈을 풀어 엔화를 약세로 돌렸지만, 우리나라는 경상수지 흑자가 연간 1000억달러가량 쌓이는데, 무슨 수로 원화를 약세로 돌리겠는가.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가 재정위기의 그늘 아래 있다. 이를 털어내고 세계 자본주의가 과거의 부흥시대로 곧 돌아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가운데 일본의 제조업을 더 따라잡지는 못하고, 중국에 세계 시장을 내주는 게 우리 현실이다. 중국 내수 소비 시장에서조차 밀리고 있을 정도로 수출 주력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낙수효과가 없는 수출을 떠받치기 위해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 수출시장에서 더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팔 수 있게 길게 보고 변화를 추동해가는 수밖에 없다. 위기를 잘 넘기려면 내수가 균형있게 성장하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처럼 건설경기를 부양하고 부채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위기를 키울 뿐이다. 고용보험과 연금제도를 더 확충해 앞날에 대한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조세정책을 통해 소득과 부를 재분배하여 소비 여력을 키우는 일이 참으로 시급하다. 정남구 경제부장 je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