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중학교 1학년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잠자다 생각하다 심지어 죽는다가 왜 동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 아닌가? 있다, 없다, 그렇다, 아니다를 의미하는 be 동사는 더욱 이상했다. 영어 선생님한테 물었더니 “존재 동사”라고 하셨다. 나는 충격 받았다. 아, 존재는 동사구나.

내 기억이 거짓은 아니지만 경험은 과거에 대한 선택적 해석이므로 위 이야기는 현재 생각이기도 하다. 맥락이 의미를 규정한다. 뷔히너, 포크트, 몰레스호트 같은 과학자 이름이 난무하는 18세기에서 19세기 말에 걸친 독일 사회가 배경인 이 책을 1980년대 남한 사람인 내가 이해했을 리 없다. 하지만 고전이 왜 고전이겠는가. 고전은 무식의 면죄부다. 아무 때나 인용하고 표기 그대로 오해해도 된다는 허가증이므로, 고전으로 간주되는 책들은 태생부터 반동적이며 동시에 해방구다.

이 책의 초점은 당대 자연과학의 발전과 유물론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어서 구체적이고 흥미진진하다. 과학사로 읽어도 재미있다. 엥겔스는 책 말미에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의 몇 가지 언급을 부록으로 실었다.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다. 이 글 제목은 마지막 열한번째 구절(90쪽). 마르크스 사후의 일이고 원래 메모에는 “그러나”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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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 구절에 동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이 문구에 대한 나의 관심사는 비판이란 무엇인가이다. 그전에는 여성에게 해석은 곧 변혁이므로 나만의 언어를 갖는 것에 몰두했다. “서구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표현을 조롱했지만, 근대 이후 서구 철학이 마르크스의 주석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중 하나가 이 문장이다. 현실(present)과 현실의 재현(re-present)과의 관계, 즉 사회 변화에서 언어(담론)의 ‘역할’은 영원한 논쟁거리다. 이 격렬한 구절은 숭배받았고 또 그만큼 비판에 시달렸다.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은 ~ ”. 과거와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이 관용구의 운명은 자기 논리에 의해 자신도 부정된다는 사실이다. 파생(派生)된 것은 바다를 이루고 파도가 되어 ‘기원’을 삼켜버리기 마련.

이 구절은 마르크스주의의 위업과 한계의 절정을 상징한다. 그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언어가 길이 끊어졌음을 알고 웃었을 것이다. 알튀세르, 푸코, 라클라우나 스피박, 무페, 버틀러 같은 일군의 페미니즘은 보완이든 비판이든 상호 비판이든 마르크스의 길을 연결한 공신들이다. 이들의 요지는 해석과 변혁은 분리되지 않으며, 다르게 해석하는 행위가 곧 변혁이라는 것이다. 신앙을 포함 모든 철학은 변화를 위한 것이다. 해석이 곧 실천임은 당연한 이야기고 문제는 누구의 해석이냐, 그것을 누가 대표로 말할 수 있는가다. 또한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소통 과정에서 변형된다. 투명한 언어는 없다. 사실, 인간은 언어로 말하지도 않는다. 소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율은 3~7%. 나머지는 몸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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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었던 스무살 때부터 나는 변화는 곧 비판이며 비판은 곧 저항이고 저항은 무조건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 문장에는 비판이라는 표현도 없는데… 비판, 저항, 방어(자기 합리화)가 모두 같은 행위였으니 끔찍한 일이다. ‘변화시켜야 할 대상’은 마치 분노처럼, 타인을 향할 때 폭력이고 나를 향할 때 우울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날엔 폭력적이었고 지금은 우울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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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비판은 자신이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되지도 못할 미래 혹은 진실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난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혹시 비판이 생계가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최악의 비참이다. 나는 왜 존재 자체를 수용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동사인 것을.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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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라는 실천은 푸코의 작두 위에서 춤추는 일이다. 다행인 것은 모든 비판은 자기 변화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모든 비판자들을 존경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