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훈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쓴 시라고 한다. 쓴웃음이 난다고들 한다. 나는 이 시보다 이 시를 소개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뜨뜻미지근한 반응들이 더 무섭다. 이 시는 ‘왜 달리는 줄도 모르는 경주마가 되어 트랙을 질주하게 하는’, 거대한 무의미의 체제가 되어버린 오늘날 학교교육에 대한 더없이 적확하면서도 통렬한 비난이다. 부끄럽고, 속상하고, 창피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체제 바깥으로 탈출하고 싶으나, 그 바깥은 낭떠러지일 것이라 믿고 있는 ‘불안’과 ‘공포’가 이 거대한 낭비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교육불가능’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이 체제의 바깥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실은 온갖 교육적 가능성이 넘실거리는 신천지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바깥을 넘겨다보는 노력 그 자체가 성장이며 해방의 담론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교육불가능 담론에 대한 교사집단의 반응은 매우 정서적인 것이었다. ‘근대적 학교교육이 언제는 가능했냐’는 선지식 같은 반응에서부터, 우리는 그래도 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잘해보려고 애쓰는데 당신들은 왜 힘을 빼느냐는 볼멘소리들, ‘근본적인 비판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실용적 반응까지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논리라기보다는 정서적인 반응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진보 교육감이 다수의 지방교육행정을 장악한 이 시점에서 논의는 더 어그러져 가는 것으로 보인다. 뭔가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불어넣어지고, 그나마 옅게 존재하는 교사집단의 개혁적 에너지는 혁신학교로 집중된다.
혁신학교는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수업 과정과 학교문화의 개선 운동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정이 매우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학교교육이 강요하는 배움 그 자체가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그리고 한 존재의 내적 성장과 사실상 무관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일부 초등학교·중학교 혁신학교의 성공이 그 지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어이없는 역설, 고등학교 혁신학교가 결국 대학입시의 입학사정관제를 뚫어내는 방편으로서 성공의 근거를 찾아야 하는 역설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성공적으로 정착한 혁신학교가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중산층의 진입장벽으로 귀결되고, 오늘날 이 거대한 낭비의 종착점이자 모든 교육적 에너지의 블랙홀인 대학입시를 피해갈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 것인가? 이렇게 해서 혁신학교의 트랙을 따라 나온 아이들을 기다리는 현실이 청년실업, 비정규직, 극악한 지위경쟁이라면 혁신학교는 결국 또 하나의 희망고문이자 문제의 떠넘기기 곧 ‘폭탄 돌리기 게임’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육불가능의 이야기는 혁신학교가 집중하는 ‘수업과 학교문화’로 수렴되는 ‘배움의 적응’이 아니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라는 ‘다른 배움’의 이야기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의 교육 체제를 어떻게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체제 전환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민사고와 하버드를 향한 트랙에서 빠져나와 곧장 미용사가 될 길을 열어주는 것이 진짜 혁신이다. 작금의 혁신학교 운동은 답이 될 수 없으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