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궁’(送窮)이라는 세시풍습이 있다. 음력 정월 초닷새(혹은 그믐)에,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는 귀신인 ‘궁귀’(窮鬼)를 쫓는 것이다. 삼황오제 가운데 하나인 전욱의 아들이 옷 입기를 싫어하다 요절했는데, 귀신이 된 뒤에도 새 옷을 주면 일부러 구멍을 뚫어 입는다고 한다. 이 전욱의 아들이 궁귀의 원형이며, 그에 대한 제사에서 송궁 풍습이 나왔다.
당나라의 문인 한유는 이 풍습을 소재로 ‘궁귀를 보내는 글’(送窮文)을 썼다. 주인공은 새해를 맞아 버들과 풀로 수레와 배를 엮고 먹을거리를 실은 뒤, 궁귀를 불러 무리를 끌고 떠나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그랬더니 궁귀가 주인공을 시험했다. “궁귀는 몸이 하나인데 무리라니 무슨 말인가?” 주인공은 말했다. “그대들은 다섯 분야를 나눠 맡고 있다. 냉철하게 따지면서 남을 해치지는 못하는 지혜의 궁귀(智窮), 먹고살기 어려워도 근본을 파고드는 공부의 궁귀(學窮), 세상에서 돈은 안 되지만 혼자 절묘한 표현을 즐기는 문학의 궁귀(文窮), 잇속은 못 챙기면서 남 좋은 일만 하는 사명감의 궁귀(命窮), 벗에게 간 쓸개 다 내주고 늘 뒤통수 맞는 사귐의 궁귀(交窮), 이 다섯 가지 아닌가? 이 다섯 귀신이 나를 헐벗음, 굶주림, 오해, 비난, 혼란 등 다섯 근심에 시달리게 해왔다.” 궁귀는 이렇게 답했다. “선생이 우릴 잘 알고 쫓아내려 하는데, 작게 보면 똑똑한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어리석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사는가. 우리는 선생의 이름이 백세 뒤에도 지워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직 세태와 어긋나야 비로소 하늘과 통한다(惟乖於時, 乃與天通).” 이 말을 들은 주인공은 손을 모아 사과한 뒤, 궁귀를 보내려고 만든 버들 수레와 풀 배를 태우고 이들을 상석으로 모셨다. 공자는 “군자는 궁함을 굳게 지키지만, 소인은 궁하면 멋대로 행동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고 했다. 이 글과 통하는 말이다.
오늘은 입춘이자 궁귀 보내는 날이다. 요즘 날뛰는 궁귀는 하우스푸어, 렌트푸어, 카푸어, 워킹푸어, 에듀푸어 등 ‘푸어’ 돌림 항렬이다. 이 신흥 궁귀들은 모두 쫓아 보내고,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우정을 위해 굳게 지킬 궁귀들만 상전으로 모시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상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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