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의 역사는 장신 선수들이 만들어왔다. 위력적인 장신이 나타날 때마다 농구 규칙도 바뀌었을 정도다. 김종규(22·206㎝)도 한국프로농구연맹(KBL) 드래프트 규정을 바꿔버린 화제의 인물이다. 적지 않은 팀들이 ‘김종규를 지명하려고 고의 패배를 하고 있다’는 의혹에 시달리자, 케이비엘은 잡음부터 없앨 생각으로 드래프트 추첨 방식을 바꿨다. 직접적으로 김종규에게 영향을 준 변화는 아니지만, 그만큼 존재감이 대단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런 김종규에 앞서 케이비엘 역사를 주도해온 빅맨이 있다. 바로 ‘효자 엠브이피(MVP)’ 김주성(35·205㎝)이다. 막 열기가 점화된 2013~2014 시즌에는 한국 빅맨 계보를 이을 김주성과 김종규의 맞대결을 눈여겨보는 것도 좋은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우승팀에는 꼭 뛰어난 센터가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농구대표팀이 2014년 농구월드컵 진출을 확정지은 지난 8월11일, 그날 밤 필리핀 마닐라 시내의 한 식당에서는 목표 달성을 자축하는 대표팀 선수들의 회식이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큰 부담감을 비로소 떨쳐낸 자리였다. 서로의 격려가 이어지던 중 센터 김종규는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내가 조금만 잘했어도….” 만약 필리핀과의 4강에서 자신이 더 잘했다면 대만과 힘들게 3~4위전을 치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왔다. 자신을 붙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던 선배들에게도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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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에 앞서 먼저 눈시울을 붉힌 이가 있었다. 대표팀 최고참 김주성이다. 국가대표를 상징하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지도 16년, 대표팀이 세계 대회에 결석한 시간도 16년이다. 그는 월드컵 무대를 밟은 마지막 선수였다. 아직 스무살도 안 됐을 때다. 그런 그가 코트를 떠날 때가 돼서야 가슴에 품어왔던 목표를 달성했다. 후배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1998년 대회는 까마득하다. 선배들 모두 ‘아저씨’ 같았다. 이제야 그 목표를 달성했다.”

각기 다른 이유로 눈물을 보인 두 키다리는 한국 농구 골 밑의 계보를 이을 주인공들이다. 마른 체구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탄력과 근성으로 ‘전쟁터’에서 이겨왔다. 대학에서 져본 일이 없고, 대학생 때부터 태릉선수촌이 낯설지 않았던 그들은 케이비엘이 개최하는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도 부동의 1순위로 선발됐다. 김주성은 프로선수가 된 이래 소속팀 동부에 3번(2003, 2005, 2007)의 챔피언 트로피를 선물했고,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심지어 올스타전에서도 엠브이피가 됐다. 동부의 연고지 원주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였으며, 사상 최초로 연봉 7억원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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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김주성에게 김종규를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종규는 이제 막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디딘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주성이 처음 프로에 데뷔했던 2002년에도 전문가들은 이런 말을 했다. “서장훈과 김주성을 비교하는 것은 김주성에게 가혹하고 불공평한 일이다”라고. 김주성은 그 가혹하고 불공평한 비교에서 살아남았다. 서장훈처럼 역사에 남을 득점 기록을 세우진 못했지만, 한국 농구에서 뛴 그 어떤 장신 선수보다 많은 블록슛을 기록했고, 승리를 선사했다. 서장훈이 ‘공격’에서 장기를 발휘하는 동안, 김주성은 ‘수비’에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김종규가 김주성과 비슷하다. 마른 체형과 엄청난 탄력, 그리고 아직 덜 다듬어진 공격 능력은 2002년 데뷔 당시의 김주성을 생각나게 한다.

케이비엘 드래프트 규정 바꾼 화제의 장신 신인 김종규 앞엔 16년 프로무대 효자 엠브이피인 원조 빅맨 김주성이 있었다김주성은 205㎝의 큰 키로 골밑부터 3점슛 라인 오가며 견제 수비 성공 후엔 덩크로 득점까지 프로농구 최고연봉 선수 됐지만 수비와 궂은일 묵묵히 소화

현대 한국 농구는 ‘높이’가 지배해왔다. 중앙대-기아를 거친 김유택-한기범 콤비가 ‘농구대통령’ 허재를 도와 실업 무대를 평정했다. 그러자 서장훈의 연세대가 그 아성을 무너뜨렸고, 여기에 전희철-현주엽을 앞세운 고려대가 도전했다. 스포트라이트는 가드와 슈터에게 쏟아졌지만 감독들이 드래프트에서 먼저 뽑은 선수들은 대개 장신 선수들이었다. “가드는 관중을 즐겁게 해주고, 빅맨은 감독을 즐겁게 해준다”는 속설 그대로다. 1997년 케이비엘 출범 뒤에도 우승팀에는 꼭 뛰어난 센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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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센터’가 ‘센터들’이 된다면 어떨까? 초창기 케이비엘은 외국인 선수 2명을 동시에 코트에 내보낼 수 있었다. 어느 팀 외국인 선수가 더 역량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명암이 엇갈렸다. 서장훈을 보유한 에스케이(SK)는 2m급이 무려 3명이었다. 덕분에 3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현대 독주를 수월하게 저지할 수 있었다. 김주성의 동부(당시 티지 삼보)는 더 막강했다. 김주성을 보유한 삼보의 전창진 감독(현 부산 케이티)은 ‘산성’을 구축했다. 누가 와도 쉽게 넘을 수 없는 수비형 장신 라인업을 구축한 것이다. 덕분에 최저실점 기록은 다 갈아치웠다.

35분 이상 묵묵히 뛰는 ‘환갑’ 농구선수

김주성은 초창기만 해도 득점력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대학 때야 본인보다 큰 선수가 없어 쉽게 점수를 올렸지만, 프로는 힘도 좋고 외국인 선수를 상대하다 보니 장점 발휘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의 역할은 주로 수비에 집중됐다. 대개 센터라 하면 골 밑을 지키면서 리바운드를 잡는 역할로 생각했지만, 김주성은 달랐다. 키가 큰데 스피드가 좋다 보니 골 밑부터 3점슛 라인까지 활발히 오가면서 상대를 견제했다. 수비 성공 뒤 속공이 펼쳐지면 가드만큼이나 신속하게 속공에 가담해 시원한 덩크를 꽂았다. 205㎝짜리가 붕붕 날아다니니 상대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전창진 감독은 그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수비 작전을 내세웠다. 바로 ‘3-2 드롭존’이었다. 2012~2013 시즌, 서울 에스케이 문경은 감독이 꺼내들어 리그를 평정했던 그 수비로, 이 수비의 원조가 바로 김주성의 동부였다. 3-2 지역방어의 변형된 형태로 가운데 위치한 선수가 골 밑부터 외곽을 오가면서 상대를 견제하는 것이다. 김주성이 초창기에 그 역할을 맡으면서 수비는 더 견고해졌다. 케이비엘 최초로 70점대 평균 실점을 기록한 것도 모자라 60점대 실점도 노렸다. 실점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승리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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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의 장점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발전이 없다는 말로 오해해선 안 된다. ‘청룡군단’ 중앙대 시절부터 늘 겸손했다. 그러면서 자기 발전에 대한 의지는 대단했다. 흔히들 ‘운동선수 집안’은 부유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단체 경기의 경우 부모의 뒷바라지가 여간 필요한 운동이 아니다. 최근 중·고교 농구에서는 지방에서 대회가 열릴 때면 부모들도 생업을 뒤로하고 함께 내려가 식사를 챙기는 등 선수단을 보필하는 팀도 많다.

김주성에게 이러한 보필은 그저 ‘꿈’과 같았다. 중학생 때 이미 190㎝를 훌쩍 넘겼지만, 체계적인 관리를 받진 못했다. 집안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 부친 김덕환씨는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고, 모친 이영순씨는 척추측만증을 앓아왔다. 가내수공업으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온 가운데 어린 시절 김주성은 두 다리 시원하게 뻗고 잘 공간조차 없었다. 그는 부모를 원망하지도,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프로농구 최고연봉자가 된 뒤에도 “내가 잘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덕분”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2008년 우승 당시에는 “어머니 몸이 더 안 좋아지셨는데 내가 걱정할까봐 더 크게 웃어주시고 손잡아주신 어머니의 힘이 우승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주성이 프로농구 최고연봉 선수가 된 것은 2007년이었다. 서장훈을 추월해 6억8천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플레이 스타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연봉이 높아질수록 수비와 궂은일에 열심히 임했다. 2013~2014 시즌 초반에는 케이비엘 최초 900블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래서 짓궂은 질문을 던져봤다. “수비만 신경을 쓰고, 공격은 등한시하는 것 아닌가? 그 정도 연봉이라면 감독도 평균 득점에 대한 기대치를 갖고 있을 텐데?” 그러자 김주성은 단호하게 답했다. “연봉 때문에 화려한 것에만 신경을 쓴다는 말은 듣기 싫다. 내 장점을 더 활용하라고 연봉을 많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역할은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일이다. 팀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김주성도 필요할 때는 득점을 하는 선수였다. 투박했던 공격 기술은 매년 갈고닦아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1 대 1로 언제든 점수를 따내는 선수가 됐다. 2008년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는 홀로 36득점을 쓸어 담는 등 5경기 평균 25.2점을 기록했다. 2013년 10월22일 삼성과의 원정경기에서도 종료 2초 전, 승부에 쐐기를 박는 골 밑 득점도 뽑아냈다.

김주성도 어느덧 서른다섯이다. 곧 있으면 농구선수로서는 ‘환갑’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35분 이상을 묵묵히 소화하고 있다. 아시아선수권대회로 인해 여름을 고스란히 선수촌에서 보냈건만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장신 선수에게 흔히 나타나는 무릎 부상도 그에게는 먼 얘기다. 그는 웨이트트레이닝이나 무리한 러닝과 같이 하체에 부담을 주는 운동은 최대한 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그러면서도 외국인 선수들이나 힘 좋은 후배들과 골 밑에서 경쟁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라 말할 정도. 이는 10년 넘게 프로생활을 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람에 따라 방법이야 다르겠지만, 2002년 데뷔 이래 큰 흔들림 없이 정상을 지켜온 그의 노하우는 이제 막 프로에 첫발을 내디딘 김종규도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IMAGE3%%] 김종규를 지탱한 김주성의 ‘원 포인트 레슨’

2013년 7월 진천선수촌. 국가대표팀 유재학 감독의 혹독한 훈련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종규는 유재학 감독이 추구하는 복잡한 전술을 쫓아가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가뜩이나 전술도 어려운데 상대하는 선수들도 죄다 프로에서 한가락 하는 선배들뿐이었다. 몇년째 대표선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렵기는 매번 똑같다. 그럴 때면 김주성이 나섰다. ‘잔소리 반, 격려 반’이라는 김주성의 ‘원 포인트 레슨’은 김종규를 지탱해주었다.

“무턱대고 점프하니까 파울을 하지.” “이때는 네가 이쪽으로 움직여야 해.” 수비할 때 위치부터 블록슛을 시도할 때의 타이밍까지, 김주성은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20대 초반의 김주성도 서장훈을 교재 삼아 대표팀에 적응했다. 함께 2002년 아시안게임 우승을 견인하면서 자신감도 얻었다. 지금은 김종규가 그 수혜자가 됐다. 꾸준히 대표팀에서 함께한 덕분에 월드컵 무대까지 밟게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농구를 시작해 낙생고등학교, 경희대학교를 거친 김종규는 이미 대학 3학년 때부터 “지금 프로에 나와도 드래프트 1순위”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6㎝의 큰 키에 점프는 웬만한 가드보다도 높게 뛰고, 속공에 가담하는 스피드도 엄청났기 때문. 미국프로농구(NBA)의 명장 조지 칼 감독은 “스피드와 신장을 모두 갖춘 선수는 찾기 힘들다. 그런 선수를 찾았을 때 투자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말을 했다. 최인선 전 기아 감독도 “기술은 어떻게든 가르쳐도, 선천적인 신장이나 탄력은 가공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빅맨의 가치를 평가했다. 김종규가 그런 선수였다. 장신의 부모(부친 188㎝, 모친 170㎝)로부터 물려받은, 한국 농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축복받은 하드웨어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2010년, 김종규가 광저우아시안게임 예비엔트리에 선발되어 성인대표팀에 처음 승선했을 때 나이는 겨우 19살이었다. 비록 최종명단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당시 지휘봉을 잡고 있던 유 감독은 ‘어렸을 때 하나라도 더 배우라’며 미국 전지훈련까지 데리고 다녀왔다. 대표팀에 다녀올 때마다 그의 기량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 업그레이드된 실력은 경희대를 살찌웠다. 경희대는 2011년 대학리그 15승1패(1위), 2012년 대학리그 21승1패(1위), 그리고 이번 대학리그에서도 15승1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2013년에는 고려대 기세에 다소 밀린 감이 있었지만, 지난 3년간을 통틀어 봤을 때 경희대만큼 지는 것이 어색한 팀도 없었다. 나가는 대회마다 상이란 상은 휩쓸었으니 말이다. 2011년에는 34연승도 달렸다.

그 중심에 김종규가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팀 공격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김주성과는 달리, 김종규는 자신의 공격보다는 김민구(전주 케이씨씨)와 두경민(원주 동부)을 살리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두 선수는 김종규와 엮여 ‘빅3’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공수에서 출중한 기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최부영 감독은 김종규의 역할을 스크린과 리바운드 등 궂은일, 그리고 김민구, 두경민이 찔러주는 패스를 받아서 점수로 연결시키는 것으로 한정했다.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은 평소 그의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 화려한 플레이를 즐기는 김종규이지만, 코트 밖에서는 조용하면서도 원만하다. 친구들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할 줄 안다. 아무리 상대팀이라도 좋은 일에 대해서는 축하하고 칭찬부터 해주는 선수이기도 하다.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겼던 고려대학교 후배 이종현(206㎝)을 만나자 먼저 악수를 건네며 “축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매사 긍정적이고 변명을 싫어한다. 고된 훈련과 일정도 묵묵히 소화했다. 무릎이든 발목이든, 경기가 끝난 뒤 목발을 사용할지 몰라도 코트에 있는 동안에는 오로지 림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지난 드래프트 1순위 지명으로 보상받았다. 마침 김종규를 지명한 팀도 오매불망 ‘온리 김종규’만 외치던 엘지(LG). 누구보다도 김종규 같은 장신 선수를 원했던 팀이었다.

현시점에서 김종규가 내세울 수 있는 최대 장점은 탄력이다. 잦은 부상으로 대학 1학년 당시에 비해 탄력이 줄었지만, 여전히 그 어느 장신 선수들보다도 우월하다. 덕분에 대학농구 팬들은 엔비에이나 미 대학농구(NCAA)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덩크쇼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2013년 대학리그 올스타전에서도 ‘에어워크’를 선사하며 당당히 덩크슛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물론 김종규가 화려함만 추구하는 선수는 아니다. 수비에서는 그 장신을 활용해 상대 득점원들의 사기를 꺾어놨다. 2학년 때는 평균 3.0개의 블록슛으로 전체 1위를 차지했고, 3~4학년 때도 2위를 지켰다. 리바운드 역시 꾸준히 두자릿수를 기록해 ‘더블-더블’(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블록, 스틸 등 항목 중 2부문에서 10개 이상을 기록하는 것)을 도맡아했다.

부모님께 큰 키 물려받은 김종규 대표팀에서 향상된 실력으로 3년 연속 경희대 우승 이끌어 타고난 탄력으로 화려한 플레이 공격 기술 향상은 남은 숙제두 사람은 마른 체구지만 큰 키·탄력·근성으로 이겨왔다 신인·노장 비교 가혹하지만 서장훈 보고 배운 김주성처럼 김종규도 김주성처럼 성장 가능

하지만 김종규를 가르쳐본 대표팀 감독들은 한결같이 ‘공격 기술’을 숙제로 꼬집었다. 이상범 안양 케이지시(KGC) 감독은 “대학 시절에 센터 위주로 농구를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개인 공격은 떨어진다. 픽앤롤, 포스트업 등 자기 장점을 살릴 만한 플레이가 안 나온다”고 말했다. 유재학 감독 역시 “자기가 찬스를 만들어서 점수를 올리지는 못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4학년 들어 훅슛, 돌파, 점프슛 등 공격 방식이 다양해지긴 했지만, 당장 프로에서 20점씩 올릴 수준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 김종규에게 김주성의 발전 과정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슛과 어시스트 등 다방면에서 김주성은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고 있다. 데뷔 초창기만 해도 결코 듣지 못했던 평가다. 많아야 2개 수준이었던 어시스트는 평균 4~5개에 육박하고 있다. 다만 김주성의 경우 좋은 조력자들이 많았다. 특히 선수 말년에 포인트가드로 변신한 허재 감독(케이씨씨)의 존재감이 큰 도움이 됐다. 입맛에 맞게 패스가 들어가다 보니 쉽게 점수를 따내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익혔다. 외국인 코치 제이 험프리스, 국내 최고의 풋워크를 자랑했던 김영만 코치도 김주성에게는 좋은 스승이었다. 실전 무대도 도움이 됐다. 당시만 해도 상대 선수들이 죄다 외국인 선수들이었다. 강한 상대와 만나다 보니 금방 실력이 늘었다.

하승진·함지훈·오세근·이종현의 한계는…

김종규도 당장보다는 멀리 내다보고 경험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이는 지난 8월, 프로-아마 최강전 당시 유재학 감독이 대학팀과의 경기 뒤 내린 평가와도 일맥상통한다. “키가 고만고만한 대학생들 상대로 올린 기록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김종규 같은 선수들은 더 크고 힘이 센 외국인 선수들과 경쟁해서 배워야 한다”며 말이다. 실제로 대학에서는 천하무적이었던 김종규였지만, 지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키 크고 힘센 선수 둘이 붙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어영부영하다가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다. 아시아선수권대회 회식 자리에서 김종규가 눈물까지 흘리며 아쉬워했던 궁극적인 이유도 바로 이러한 대처능력 부족으로 공을 뺏기고 말았던 순간 때문이었다.

다행히 엘지에는 장신을 잘 활용하는 김시래라는 전도유망한 포인트가드가 있다. 밖에는 문태종과 김영환, 박래훈이라는 걸출한 슈터들이, 옆에는 데이본 제퍼슨과 크리스 매시 등 ‘잡으면 한 골’로 통하는 보디가드들이 있다. 따라서 굳이 팀에서 뭔가를 해서 ‘1순위답다’는 평가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찬스를 만들다 보면 발전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기술보다도 김종규가 김주성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관리다. 통산 평균 34분16초, 플레이오프에서는 이보다도 훨씬 긴 37분2초씩을 꼬박꼬박 주전으로 소화했다. 안 다치고 최상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김종규는 대학에서의 혹사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프로에 데뷔한다. 언제든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김진 감독도 그 위험성을 발견하고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2주간의 휴식을 내줬다.

2013~2014 시즌은 한국 농구 부흥의 적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시아선수권대회 선전과 대학생 스타들의 등장, 여기에 프로-아마 최강전 흥행이 이어지면서 지난봄 농구계를 뒤덮었던 암울한 기운을 걷어냈다. 또 프로농구에는 김민구, 두경민, 박재현 등 ‘핫’한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2주 휴식이 끝나가고 있는 김종규도 출격대기중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봤을 때 김종규는 단순히 프로농구 흥행만이 아닌, 한국 농구의 향후 10년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한국 농구 골 밑 자원은 열악하다. 222㎝의 하승진(케이씨씨, 공익근무)은 내구성이 떨어져 국가대표팀에 꾸준히 합류하기 어렵다. 함지훈(모비스·198㎝)은 뛰어난 기술에 비해 신장이나 탄력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미 국제대회에서도 쉽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검증됐다. 2012년 케이지씨 인삼공사를 우승으로 이끈 엠브이피 오세근(200㎝)은 고질적인 발목 부상이 문제다. 게다가 군 문제도 걸려 있어 병역의무를 마칠 무렵에는 서른살이 된다. ‘미래’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이기에는 늦은 시기다. 대학 무대에서 이종현이 뛰고 있으나 귀화 선수가 판을 치는 아시아 무대에서 혼자만으로는 경쟁력이 떨어진다. 김종규는 아시아 선수들을 능가하는 탄력의 소유자다. 여기에 기술과 노하우를 채워간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대표팀의 경쟁력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2014년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김종규 업그레이드’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과연 김종규는 김주성의 대를 이을 빅맨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김주성과 동부를 상대로 선배에게 ‘배운 대로’ 플레이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시작된 프로농구 정규리그, 동부와 엘지의 맞대결을 기다려봐야 할 이유다.

손대범 점프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