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유학할 때인 1975년 10월21일 나는 티브이를 통해 보스턴 레드삭스와 신시내티 레즈가 맞붙은 월드시리즈 6차전을 관전하였다. 고수들의 멋진 수비와 호쾌한 타격으로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무수히 많은 야구 경기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만이 아니다. 이에스피엔(ESPN)은 그해 월드시리즈를 월드시리즈 역사상 둘째로 훌륭한 시리즈였다고 자리매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네트워크(MLB Network)는 그 시리즈의 6차전을 월드시리즈 역사상은 물론이려니와 포스트시즌 역사상 그리고 야구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명승부라고 평가하였다.

신시내티는 시즌 중 내셔널리그 서부에서(104승 58패)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를 20게임 차로 제친 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동부의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3승 무패로 눌렀다. 한편 보스턴은 아메리칸리그 동부에서(95승 65패)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4게임 반 차로 따돌린 뒤 전년도까지 세 번이나 계속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서부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역시 3승 무패로 이겨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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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시내티 레즈는 7차전까지 가서 9회초 조 모건의 안타로 보스턴 레드삭스를 7-6으로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차지하였다.

경기 지연시킨 폭우는 명승부의 전조였나

그러나 재미는 6차전이 더 있었다. 보스턴의 펜웨이파크 구장에서 열린 6차전은 연장 12회까지 가며 ‘야구의 고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경기였다. 결국 12회에서 칼턴 피스크의 홈런으로 보스턴이 이겼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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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10월 하순 저녁은 쌀쌀하다 못해 추웠다. 그러나 관중의 응원 그리고 선수들의 투지는 뜨겁다 못해 폭발적이었다.

1차전과 4차전을 잡은 보스턴 레드삭스와 2, 3, 5차전에서 승리한 신시내티 레즈. 양 팀은 모두 월드시리즈 우승에 굶주려 있었다. 1960년대를 암울하게 보낸 신시내티는 70년대에 명감독 스파키 앤더슨을 맞아 여러번 정상을 노크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다가 이번에는 꼭 이겨 시리즈를 제패하겠다고 다짐했다. 조니 벤치, 토니 페레스, 조 모건, 피트 로즈 등 연속 안타 능력이 기관총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빅레드머신’으로 무장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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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게임에서 지면 시리즈를 신시내티한테 넘겨주게 되는 보스턴은 어떻게든 홈구장인 펜웨이파크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랜 ‘밤비노의 저주’(밤비노는 베이브 루스의 애칭으로 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한 뒤, 오랫동안 월드시리즈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불운을 일컫는 말이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86년 만에 우승을 거두면서 비로소 오랜 저주의 속설에서 벗어났다)를 깨고 싶어했다.

때마침 뉴잉글랜드에 내린 폭우로 경기는 72시간이나 지연되었다. 이것이 명승부를 알리는 전조임을 경기 시작 전에는 아마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스턴은 1회말 2사 후 프레드 린의 3점 홈런으로 기선을 제압하였다. 또한 에이스인 루이스 티안트(루이 티안)는 레즈 타선을 4회까지 침묵하게 했다. 그러나 레즈는 5회초 켄 그리피가 중앙 방면으로 쳐낸 2타점 3루타로 반격하였다. 이 공을 센터 펜스에 부딪치며 거의 잡을 뻔한 린은 갈비뼈에 부상을 당하고도 수비를 계속했다. 이어서 조니 벤치의 안타로 그리피가 홈에 들어와 게임은 3-3 동점이 되었다.

미국 유학시절 TV로 본 경기 멋진 수비와 호쾌한 타격으로 어릴 때부터 보아온 무수히 많은 야구경기 가운데 단연코 최고!7회초부터 신시내티가 앞섰지만 대타로 나온 카보의 8회말 홈런 9회말 무사만루 못 살렸음에도 신출내기 피스크의 12회말 홈런 의외의 연속 끝 보스턴이 승리

레즈는 계속해서 7회초에 조지 포스터가 2타점 2루타를 치고, 8회초에는 세사르 헤로니모(시저 제로니모)가 솔로 홈런으로 티안트를 괴롭혔다. 스코어는 6-3.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신시내티는 단 6개의 아웃카운트만 남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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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8회말 공격에 나선 보스턴은 선두타자 린이 안타를 치고 출루한 뒤 다음 타자 리코 페트로셀리가 볼넷으로 진루했다. 신시내티는 투수 교체로 이 위기를 넘기려고 했다. 그리고 교체된 투수 롤리 이스트윅은 감독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첫 타자 드와이트 에번스를 삼진으로 잡고, 두번째 타자인 릭 벌슨마저 뜬공으로 처리했다. 순식간에 2사가 된 보스턴은 카보를 대타로 내보냈다. 카보는 이미 3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홈런을 쳤었다. 이스트윅의 구위에 눌려 힘없어 보이던 카보가 볼카운트 2스트라이크 2볼에서 받아친 공은 운동장 가장 깊은 곳으로 날아가 관중석에 꽂혔다. 다시 6-6. 동점 홈런이자 월드시리즈 사상 최초로 대타로 나와 2개의 홈런을 치는 순간이었다.

“노! 노! 노!”를 “고! 고! 고!”로 잘못 듣다

보스턴은 9회말 레즈의 7번째 투수 매키나니를 공략하며 무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데니 도일은 4볼, 칼 야스트렘스키는 안타, 그리고 칼턴 피스크는 고의 4볼이었다. 그 후 린이 레프트에 얕은 플라이볼을 치자, 포스터가 그대로 받아 삼루에서 태그플레이를 하던 도일을 홈에서 잡았다. 3루 코치 돈 지머는 도일에게 노!노!노!를 외쳤지만 도일은 그것을 고!고!고!로 들었다고 한다.

연장전에 돌입한 11회초 신시내티에도 기회가 왔다. 그러나 켄 그리피를 1루에 두고 등장한 조 모건의 타구가 오른쪽 펜스를 넘기기 바로 전 에번스의 호수비에 잡히면서 주자까지 아웃돼 또 무산되었다.

경기는 12회에 접어들었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회초 신시내티는 1아웃에 주자를 둘이나 내보냈다. 토니 페레스와 포스터가 안타를 친 것이다. 그러나 데이브 콘셉시온이 뜬공으로 그리고 헤로니모가 삼진으로 죽어 또다시 기회를 날려버렸다.

마침내 이날의 하이라이트가 된 12회말. 타석에 피스크가 들어섰다. 신시내티의 8번째 투수 팻 다시가 던진 공은 피스크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파울과 페어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외야를 향해 날아가더니 결국 폴대를 맞고 끝내기 홈런이 되었다. 신출내기 피스크가 전국적인 스타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승리로 보스턴은 마지막 승부를 7차전까지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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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두 개의 대타 홈런은 소설로 쓰면 현실성이 없다. 9회말 무사만루에서 한 점도 뽑지 못하거나,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홈런성 타구를 잡아내 주자까지 아웃시키는 상황 역시 그렇다. 12회말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수가 쏘아올린 홈런은 또 어떤가. 야구의 묘미는 바로 이런 의외성에 있다. 인생도 그렇지 않던가.

1975년 월드시리즈는 나중에 명예의 전당에 모셔진 조니 벤치, 조 모건, 토니 페레스(이상 신시내티)와 칼턴 피스크, 짐 라이스, 칼 야스트렘스키(이상 보스턴), 그리고 명예의 전당에 일단 모셔졌다가 적절치 못한 행동이 밝혀져 철회된 신시내티의 피트 로즈 등이 만든 합작품이다. 신시내티의 명감독 스파키 앤더슨도 감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언제 다시 1975년 월드시리즈 6차전과 같은 경기를 볼 수 있을까? 기다려진다.

정운찬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