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각 신문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인문·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해 오찬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통령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문학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지도 밝혔다고 한다. 기사의 사진은 이 인문학계의 ‘석학’들이 얌전히 앉아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대통령은 “창조경제도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고, 한 참석자는 괴테를 인용하면서 “대통령께서 영원한 여성의 이미지를 우리 역사 속에 깊이 각인하셔서 우리 역사가 한층 빛나기를 기원한다”고 언급했다 한다.
이것이 만약 한국 인문학의 현재를 상징한다면 그야말로 비참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을 한다는 이들이라면 오늘날 한국 사회야말로 인문학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인간에 대한 예의’나 지식과 학문의 가치가 전방위로 짓밟히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박 대통령이 정의한 대로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라면 실은 무엇보다 한을 품고 죽음을 택하는 노동자들, 일에 치여 값싼 엔터테인먼트밖에 즐길 줄 모르는 대중, 상상력 대신 수량화된 평가 일변도인 교육현실 등을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는 귀를 닫은 채 고분고분한 ‘석학’들을 모셔다가 고상하게 독서 경험 따위나 나누는 일, 그것이 오늘 한국 인문학의 현재다.
최근 한국에서 ‘인문학’이라는 말처럼 오용되고 남용되는 말은 없어 보인다. 이는 ‘인문학’이 들어간 수많은 책들의 제목만 일별해도 알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인문학’, ‘부모 인문학’, ‘광고 인문학’, ‘사장의 인문학’, ‘돈의 인문학’, ‘연애 인문학’에다 심지어 ‘팬티 인문학’까지 있다. 조만간 ‘고3 인문학’이나 ‘조기유학을 위한 인문학’도 나올 법하다. 모든 것이 인문학이 되어버릴 때, 바로 그때가 인문학이 사라지는 시점이다. 도시 곳곳에 빽빽한 대형 십자가들이 역으로 종교적인 것이 상실된 시대를 표상하듯이, 긴장감도, 비판정신도, 부끄러움도 없이 모든 곳에 사용되는 ‘인문학’이야말로 그것이 실은 하나의 ‘비즈니스’일 뿐임을 보여준다. 장사만 된다면 자본주의는 혁명도 사랑도 비판정신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낸다. ‘창조경제’라는 말을 팔아먹기 위해, 자본가를 위해, 스타강사가 되기 위해, 베스트셀러를 제조하기 위해 너도나도 ‘인문학’을 갖다 붙일 때, ‘인문학’은 자신의 탐욕을 고상하고 희망찬 말로 치장하는 만능 가림막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자살률 세계 최고에 독서시간 세계 최저인 나라에서 ‘인문학’이 이토록 인기 있다는 역설이야말로 현재의 ‘인문학’이 허상임을 보여준다.
근대 인문학은 르네상스에서 기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르네상스’ 하면 무슨 호텔 이름처럼 풍요롭고 화려한 이미지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시대의 인문학자들이야말로 중세적 신의 질서, 억압적 권력, 무지의 관성에 맞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지적 전사들이었다. 대중의 입맛에 맞도록 쉽게 요약해주거나, 자본가들 상대로 호텔에서 강의를 하거나, 대통령에게 괴테를 인용해 찬사나 보내는 따위의 행위는 ‘인간의 무늬’(人文)를 탐구하는 데 따르는 지난하고 복합적이며 때로는 답이 보이지도 않는 인문학적 작업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저 소비사회의 천박한 요청에 부응해 신속하게 상품화된 지식일 뿐이다. 외려 진정한 인문학은 이 시대의 가장 불편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 가장 인기 없는 학문을 묵묵히 계속하는 일, 가장 주변부의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 속에 있다. 이 시대는 ‘인간’의 가치가 헐값으로 떨어진 총체적 야만의 시대이기에 그렇다. 이런 암울하고 절박한 시대를 쉽고 실용적이고 희망찬 말들로 포장하여 팔아치우는 오늘의 ‘인문학’, 그것이야말로 실은 가장 먼저 처리되어야 할 쓰레기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