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이렇게 많은 편지를 받아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이 생면부지 이메일의 내용은 대개 “한국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사수해 달라”는 것이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저명한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기초과학연구원 설립 관련 기사를 내보내면서 “이제 한국 정부가 세계의 과학기술을 선도하려는 시도에 시동을 걸었다”며 흥분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딱 2주 뒤에 전세계의 누리꾼들은 ‘한국이 창조론의 요구에 항복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똑같은 <네이처>에서 읽어야 했다. 아마도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세계 과학기술계를 선도하겠다던 한국이 2주 뒤에는 창조론을 인정한다니.
이런 희한한 상황은 안타깝게도 우리 과학교육의 현실이다. 그래서 스위스의 한 단체가 한국의 과학경쟁력을 5위(기술경쟁력은 14위)로 평가했다며 정부가 아무리 자랑을 해도 우리는 박수를 쳐줄 수 없다. 어떤 분들은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교진추)의 청원에 의해 시작된 과학교과서 파문이 다소 과장되어 있다고도 한다. 이번 일로 우리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 부분이 완전히 삭제되는 것도 아니고, 교과부도 절차상으로 큰 과오를 범하지 않은 것 같은데, 밖에서 더 난리라는 시각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이번 사태는 전세계 과학교과서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 특정 종교 단체가 과학교과서의 내용을 수정하도록 한 매우 위중한 사건이다.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과학기술 후진국도 아닌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물론 교진추가 기독교 단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교진추는 한국 창조과학회의 교과서분과위원회가 전략적으로 이름만 세탁해 만든 산하단체이다. 그런데 창조과학회는 누리집에서 “복음 전파의 커다란 장애물인 진화론의 허구성을 밝히고 창조의 과학적 증거를 드러내는 것”이 세부 목표라고 말한다.
이번 파문의 또다른 핵심은 이 모든 과정에서 교과부가 한 일이라곤 청원서를 출판사에 배달해준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교과부 담당자는 “국민 신문고를 통해 청원이 들어오면 해당 기관은 1~2주일 안에 응답해줘야 해 출판사를 통해 답변을 보내줬다”며 절차상 하자가 없었던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수정된 교과서를 수십만의 학생들이 밑줄을 치며 공부할 것이라는 상식적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교진추가 준비하고 있다고 떠드는 후속 청원들에 대해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발뺌을 하려는가? 또 만일 어떤 불교인이 윤회 교리를 전파할 목적으로 진화론 반대 청원을 낸다면 그 경우에도 배달원 노릇만 할 것인가?
만일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과학교과서 수정 절차와 관행에 대한 문책과 특단의 대책 마련이 없다면, 앞으로 비슷한 청원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종교적 열정만큼 못 말리는 것도 없다. 만일 교과부가 기껏 ‘청원 시에 전문가 심사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정도로 쉽게 결론 내린다면, 앞으로 진화 전문가들은 쓸데없는 심사에 불려나가 시간과 지력만 낭비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교과부는 종교적 목적으로 과학교과서의 내용에 간섭하려는 모든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 초중등교육법에도 “인정 교과서의 내용이 특정 정당·종교를 지지하는 등 교과용 도서로서 사용이 부적당하다고 우려되는 경우” 따로 심의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 법령의 정신이 종교와 과학의 분리를 내세우는 것이라면 이번 경우에도 확대적용될 만한 조항이다. 정말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싶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