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가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이번 4·11 총선에 출마한다. 학자·논객 이미지가 강한 박 교수가 현실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그 자신에게 잘된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그의 출마 결심 뒤에는 진보신당 지도부의 강한 요청이 있었던 모양이고, 그 당 당원으로서, 또 좌파 지식인으로서 그가 어렵사리 내린 결단이었을 테니 우선 반기는 게 좋겠다.

나는 박 교수의 글을 남김없이 섭렵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초창기 글부터 최근 글까지를 관심과 애정에 떠밀려 그럭저럭 따라 읽어왔다. 배운 것이 많다. 그의 전공인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글들만이 아니라 그가 정기적으로 쓰는 정치평론을 읽으면서도 내 지적 게으름을 깨닫곤 했다. 그런데 그의 초기 정치평론에 크게 공감했던 내 눈에 요즘 그의 글에선 관점의 이동이 관찰된다. 초기 글에서 그는 미국 민주당 좌파 정도에 견줄 만한 리버럴이었으나, 요즘 글에서는 완연한 사회주의자다. 박 교수의 생각에 그간 변화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가 초기엔 제 생각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다가 요즘 와서 자기주장을 또렷이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그 자리 그대로인데, 내가 그의 글을 오독한 탓에 그의 관점이 변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요즘 박 교수의 글을 읽노라면 마음이 좀 불편하다. 비록 자본주의가 많이 망가져 있기는 하나 그것을 잘 수리해서 쓰면 되겠거니 생각하는 보수주의자에게, 자본주의 자체를 근본적 악으로 여기고 그 이후를 도모하는 그의 견해는 너무 까칠까칠해 보인다. 심지어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자본주의를 때려 부수는 과정에서 생길 부작용이 자본주의 자체의 부작용보다 크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부작용을 지난 세기 70년 동안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박 교수의 도저한 국제주의도, 지금의 국민국가 체제를 하릴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벅차다. 아름답든 추하든, 인류의 지금 진화 단계에서 계급은 민족이나 국민을 이길 수 없다. 다시 말해 피(라는 관념)는 계급보다 진하다. 좌파를 자임하는 정권들이 소위 국익을 챙기는 데 우파 정권 못지않게 날쌔다는 것이 하나의 방증이다. 애국주의는 좌우 모든 정치인들이 흔들어대는 깃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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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때로는 대내적으로 민주주의자 노릇을 하는 정치인이 대외적으로 제국주의자 노릇을 하는 우스운 풍경도 생긴다. 대표적 예가 프랑스 제3공화국 정치인 쥘 페리다. 페리는 장관과 총리를 지내며 의무교육, 여성교육, 무상교육, 세속교육을 진작시켰을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는 프랑스 국경을 넘지 못했다. 그가 튀니지를 보호국으로 만들고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화하고 콩고와 인도차이나를 정복했을 때, 그의 민주주의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박노자 교수는 세상사의 복잡한 매듭을 계급투쟁이라는 칼로 단번에 잘라버린다. 그것은 그가 사람의 본성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악한 듯 보이는 인간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계급모순 때문에 생겨난다고 그는 판단하는 듯하다. 사람의 본성을 박 교수만큼 신뢰하지 못하는 나는 세상사의 복잡한 매듭을 번거롭더라도 찬찬히 풀어헤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쾌도난마는 반동을 불러오기 십상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가 누누이 가르친 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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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 박노자 교수는 한국 사회의 부정의와 세계의 비참을 진실로 가슴아파하며 그 해결을 모색하는 윤리적 인간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런 윤리인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인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테다. 박 교수는 진보신당 비례대표 명부의 6번에 올랐다. 진보신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두 해씩 나눠서 수행하기로 결정했으므로, 여느 정당에서 비례대표 세 사람을 당선시킬 수 있는 정당 지지율을 얻으면 박 교수는 두 해 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다. 비례대표 의원 세 사람을 배당받으려면 정당 지지율 5% 안팎을 얻어야 한다. 진보신당에 보내는 지지율 5%는 한국 유권자가 발휘할 수 있는 자존심의 최저선일 것이다. 그것이 10%가 되면 또 어떠랴.

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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