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서울 용산 전자상가 매장에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회담 장면이 TV로 보도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9일 서울 용산 전자상가 매장에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회담 장면이 TV로 보도되고 있다. 연합뉴스

김양희 |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바야흐로 비평화의 시대다. 늘 그랬다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처럼 두 대륙에서 강대국이 깊이 관여하는 두개의 큰 전쟁이 동시에 벌어지는 초유의 사태는 2차 대전 이후 처음이다. 만에 하나 이보다 더 위험천만한 세번째 전쟁이 터진다면, 이는 한반도나 대만해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 생존과 안위가 위태로운 엄중한 시기다.

바야흐로 보호주의 시대다. 늘 그랬다지만 지금은 다르다. 안보 논리가 전가의 보도인 양 남용되며 보호주의를 정당화시키고 가치와 이념을 명분 삼아 편을 가르는 보호주의 진영화 시대다. 미국은 안보와 직결된 첨단제조업의 부흥을 위해 해묵은 산업정책을 꺼내 들었다. 이에 맞서 주요국이 보조금 경쟁을 시작했다. 그 대상도 ‘좁은 마당, 높은 담장’이라더니 야금야금 ‘더 넓은 마당, 더 높은 담장’으로 옮기는 중이다. 어쩌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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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둘러싼 작금의 환경이 보내는 가장 뚜렷한 신호는 ‘국가의 귀환’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유능한 국가 여부다. 정책 역량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4년 재정 모니터’에서 산업정책은 마법이 아니라고 일침을 놓는다. 굳이 쓰려면 탄소배출 저감이나 산업 전반의 지식 전파 등 사회적 이익을 창출하고, 외국기업 차별은 금지하며, 정부의 정책 역량이 뛰어날 것을 성공 조건으로 내건다. 개리 피사노와 월리 시는 공저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에서 제조업 전반의 지식 전파에 기여하는 기초연구와 인재 육성 등 ‘산업 공유자산’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는 사적 이익과 대비되는 사회적 이익 창출인데, 이야말로 국가의 고유한 역할이다. 사실 한국은 조 스터드웰이 쓴 ‘아시아의 힘’에서 중국, 일본, 대만과 함께 성공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한 드문 나라로 칭송되었다.

그런 한국에 위험 징후가 감지된다. 2023년 6월28일 윤석열 대통령은 연구계 카르텔 혁파를 이유로 국가연구개발 예산 재검토를 지시했다. 그 결과 2024년도 예산이 전년보다 14.7% 깎여 총 1623건의 기초연구 중 65%가 넘는 1069건이 감액되었다. 1991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일률적인 예산 삭감에 연구계는 혼란에 휩싸여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자 정부는 내년도에는 2023년도보다 많은 예산을 책정하겠다고 한다. 그새 연구개발 체계의 비효율을 걷어냈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정부 정책에 대한 예측 가능성과 신뢰를 실추시킨 일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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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화의 시대, 보호주의 진영화 시대에 강대국에 시달리는 한국이 아무도 흔들지 못하는 나라가 되려면 국가가 더욱 유능해야 한다. 한국이 이 와중에 첨단전략산업 육성, 공급망 회복력 제고, 소재·부품·장비산업의 경쟁력 강화 등을 추진하면서 이와 조응해 미래 먹거리를 만들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 경제안보의 미래는 제조업에 달렸다고 역설해왔다. 제조업은 한국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한국 제조업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은 1988년 27.6%를 정점으로 2021년 25.5%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4%를 크게 능가한다. 한국은 국제 비교가 가능한 1991년 이후 줄곧 주요 제조 강국 중 중국 다음으로 강하다. 한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 6위(2023년), 제조업 경쟁력지수 4위(2021년)를 자랑한다. 미국 정부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신호탄으로 쏘아 올린 4대 핵심 품목(반도체, 2차 전지, 의약품, 핵심 광물) 중 해당 사항이 없는 핵심 광물을 뺀 세 분야의 제조 협력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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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이 메모리칩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따라잡은 지금, 한국의 제조업 지반 침하가 심각하다. 양승훈이 저서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에서 세밀히 묘사했듯이 울산이 휘청거릴 정도면 타 지역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한국이 첨단 제조 강국으로 버티려면 기초연구와 같은 산업 공유자산 관련 정책은 투명하고 합리적인 설계에 기반해 추진해야 한다.

22대 총선은 끝났다. 여소야대 지형이 더 공고해지자 4월29일 마침내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났다. 한국을 둘러싼 엄중한 대내외 환경을 인식한다면 야당도 선심성 현금 지원 카드는 지양하는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유능한 국가는 여당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