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화의 대표적 기법은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방식이다. 제임스 피시킨 미국 스탠퍼드대 석좌교수(정치학)가 1991년 저서 ‘민주주의와 공론조사’를 통해 개념과 방법론을 처음 제시했다. 여론조사가 특정 사안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질문을 하는 데 견줘, 공론조사는 참가자들에게 미리 지식과 정보를 제공한 뒤 토론을 거쳐 좀 더 정제된 의견을 이끌어낸다. 1차 조사→사전 정보 제공→소그룹 토론과 전문가 패널 질의응답→2차 조사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참가자 의견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파악한다. 피시킨 교수의 공론조사는 상표권 등록이 돼 있어, 명칭과 기법을 그대로 쓰려면 사용료를 내야 한다.
국내 첫 공론조사는 2005년 정부의 ‘8·31 부동산 종합대책’ 발표를 앞두고 실시됐다. 당시 정부는 부동산 투기 억제를 위해 고강도 규제 정책을 펴고 있었다. 고가 주택, 다주택 보유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정부는 공론조사를 지렛대 삼아 정책을 밀어붙였다. 종합부동산세 부담을 종전보다 늘리기로 하면서, 애초 1주택자를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공론조사 결과를 반영해 동일하게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1주택자도 적용하자는 의견은 55.6%(1차)에서 67.9%(2차)로 늘었다. 세대별 합산과세나 2주택자 양도세 강화 등의 대책에도 공론조사가 영향을 미쳤다.
학습과 토론을 거치면서 여론이 바뀌었지만 정책 추진이 중단된 경우도 있다. 2011년 조현오 당시 경찰청장은 좌(우)회전시 화살표 신호를 3색으로 도입한다고 했다가 혼선만 부추긴다는 비판 여론에 부딪혔다. 소규모 공론조사가 실시되자, 여론 분포도가 찬성 26명·반대 67명→찬성 48명·반대 47명으로 역전됐다. 다만 경찰청은 찬반이 비등한 상황에서 도입은 무리라며 정책 추진을 무기한 보류했다.
비교적 근래에 주목받은 공론조사로는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2017년), 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2018년), 선거제도 개편(2023년) 등이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은 이미 공사가 상당 부분 진행됐다는 점을 근거로 반대 목소리가 컸다. 결국 대통령이 직접 공론화에 부칠 것을 주문했고, 정부는 ‘건설 재개’로 기울어진 공론조사 결과를 그대로 수용했다. 시민의 집단지성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했다는 긍정 평가가 나온 반면에, 정부가 어려운 정책 결정을 떠넘긴 것이란 비판도 따랐다. 공론화는 정책 권고이지, 정부 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입제도 개편 논의는 수능 비중 확대라는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지만, 숙의 과정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론이 나오진 못했다. 반대로 선거제도 개편의 경우, 시민참여단의 의견은 매우 명료했으나 정치권이 이를 외면했다.
연금개혁이라는 또 하나의 공론화가 ‘조용히’ 진행 중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9%→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40%→50%로 높이자는 ‘더 내고 더 받는’ 안과 보험료율만 12%로 인상하는 ‘더 내고 그대로 받는’ 안이 공론조사에 부쳐졌다. 시민대표단 500명이 지난 13~14일 1, 2차 숙의 토론을 마쳤지만 유독 국민적 관심이 떨어진다. 이렇게 된 데는 정부 책임이 크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연금개혁은 인기가 없어도 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진 동력이 떨어졌다. 총선에서 정치적 부담을 덜려고 구체적인 정부안은 제시하지 않고 뒷짐만 져왔기 때문이다. 시민대표단의 3, 4차 토론(20~21일)이 끝나면 22일 공론화 결과가 발표된다. 공론화, 그 이후가 더 중요해 보인다. 5월 말 종료되는 21대 국회 회기 내 연금개혁이 가능할지 지켜볼 일이다.
황보연 논설위원 whyn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