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베스트셀러는 사회적 현상이라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가벼운 책이 아닌데도 한국에서 200만권 넘게 팔렸다. 정작 미국에서 팔린 건 10만권 남짓이라 한다. 그 시절 우리 사회가 공정과 정의에 목말랐음을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한단에 875원이면 합리적” 발언이 큰 파문을 불러온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대통령실은 오해라고 항변하지만, 고물가에 화난 민심이 대파를 매개로 분출했다는 게 본질이다.
총선일이 다가오면서 정권심판 분위기가 짙어져 여당인 국민의힘이 고전한다. 대통령의 일방적 국정운영, 인사 실패, 김건희 여사 문제 등도 이유지만, 심판 정서의 바닥에는 “너무 살기 힘들다”는 민생의 아우성이 흐르고 있다. 경제 형편이 조금만 나았다면 여당이 집권 2년 만에 “야당 200석만은 막아달라”며 읍소할 일은 없을 터이다.
대통령과 여당도 이번 총선의 핵심이 민생인 걸 모르진 않았다. 그러니 대통령이 노골적 선거운동이란 비판을 무릅쓰고 민생토론회를 24차례나 이어갔을 것이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재명·조국 심판이 곧 민생”이라 견강부회하며, 일부 생필품의 부가세 인하까지 들고나왔다. 하지만 이들의 민생 행보는 큰 효과가 없는 듯하다. 정책과 약속을 ‘마구잡이로 던져’ 무얼 한다는 건지 초점이 없고, 민생을 조리 있게 다룰 준비가 안 됐다는 인상만 줬다. 대통령과 여당의 민생 행보는 의대 정원 확대를 두고 진퇴양난에 빠진 모습과 닮았다. 변수가 여럿인 고차 방정식을 자꾸 산수 풀이로 접근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민생고의 두 줄기인 자영업 매출 부진과 고물가를 보자. 전에도 상황이 어려울 때가 있었지만 정부가 대응하고 시간이 가면 풀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소비와 공급의 구조가 변해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국내 자영업 환경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크게 변했다. 이른 귀가가 일상화되고 음주·회식 문화도 많이 변했다. 저녁 모임 자체가 줄었고, 그나마 밤 9시면 자리를 털고 집에 간다. 식당도 이때쯤 주방을 마감하고 일찍 문 닫는 곳이 많다. 물가가 올라 비용 부담이 커진데다, 젊은층이 단체회식을 내켜 하지 않으면서 생긴 현상이다.
1-2-3차로 이어지며 불야성을 이루던 거리 풍경은 옛일이 됐다. 지난해 서울 시내 8대 먹자골목의 새벽 시간(0~6시) 결제 건수가 2020년 대비 최소 11%, 최대 46% 감소했다(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통계). 2020년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장 엄격할 때인데 당시보다도 손님이 더 줄어든 것이다. 이러니 거리의 그 많은 식당, 호프집, 노래방에서 비명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올 1~2월 음식점 취업자 수도 1만여명 감소했다. 문화는 한번 자리잡히면 오래간다. 대신 혼술, 혼밥 등이 늘면서 음식 및 식품 구매·배달 플랫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같은 곳은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다. 한계에 이른 자영업자에 대한 대출이자 조정 등 당장 급한 지원은 하더라도 폐업 및 업주의 전직 지원 등 중장기적 구조 전환 계획이 마련돼야 한다.
물가도 중국이 세계공장 역할을 하고, 세계화된 공급망이 작동하며 저물가가 기본이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지정학적 불안, 공급망 붕괴, 기후변화 등으로 에너지와 식품 가격은 일상적으로 불안정해졌다. 우리도 채소 및 과일 등 식료품 가격 급등이 연례행사가 됐다. 사과와 배가 지난달 각각 88% 올라 통계 작성 이래 최고를 기록했고 대파, 양배추, 오징어, 김 등 다른 먹거리 물가도 크게 뛰었다. 두려운 것은 이게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 추세라는 점이다. 식량과 에너지는 체감 민생의 요체이지만 정부의 대응은 ‘진통제 처방’ 정도에 그친다. 품목별 할인 지원이나 비축분 방출을 해보지만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 식품업계를 불러 모아 ‘팔 비틀기’를 하기도 한다. 윤 대통령은 3월 물가가 발표된 2일,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을 무제한·무기한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단기엔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좀 더 긴 호흡으로 농가 인구와 재배 면적 감소세에 대응하고, 재해예방시설 보급, 스마트 과수단지 조성 등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안정적 생산시설 조성 노력을 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2월 중앙당사 회의실 뒷벽에 목련꽃 그림을 걸었다. 그 옆에는 ‘봄이 오면 국민의 삶이 피어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바야흐로 서울에도 목련이 활짝 피었다. “목련이 피면 김포가 서울이 된다”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약속이 그랬듯, 민생 회복도 오지 않는 기다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