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휴학은 ‘어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학생들이 집단으로 학교를 쉬는 일’을 말한다. 그 방식과 명분은 시대별로 달랐다.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단체행동은 출석 확인이 이뤄지는 관내 식당에서 시작됐다. 일단 식사 거부로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권당(捲堂)에 돌입한 뒤, 그래도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기숙사(동·서재)를 비우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공관(空館)을 감행했다. 조선시대에 권당·공관은 모두 96회에 이를 만큼 빈번했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의 불교 숭신에 대한 항의가 주된 명분이었고 후기로 갈수록 당쟁에 편승한 경우가 많았다. 유생들의 요구는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을 거쳐 왕에게 전달됐는데, 공관이 장기화되면 영의정이 유생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해 설득에 나서기도 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동맹휴학은 항일 운동의 성격이 컸다. 일제의 식민통치 및 교육정책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집단행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요구안에는 일본인 교사 배척이나 교내에서의 조선어 사용, 학생회 자치 허용 등이 포함됐다. 경찰에 구속되거나 무기정학·퇴학 처분을 받는 등 주동자에 대한 처벌도 엄혹했다. 미 군정기에도 동맹휴학은 이어졌다. 1946년 미 군정이 경성대학과 각 전문학교를 하나로 통합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종합안을 발표하자, 전국적으로 4만여명이 동맹휴학을 벌였다.
1960년대 이후 학생들의 요구는 동맹휴학보다 집회·시위로 표출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처럼 대학 수가 많지 않고 대학진학률도 30% 안팎에 그쳤던 시절, 학생들은 대학 울타리를 넘어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다. 4·19 혁명과 한일회담 반대, 유신 반대, 민주화 운동 등 정치적 요구를 내건 시위가 이어졌고, 이를 막기 위해 학교 당국과 정부는 걸핏하면 휴교령을 내렸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동맹휴학은 개별 전공 분야의 이해관계에 따라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교대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의대와 같이 정부 정책이 졸업 뒤 진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곳들에서 빈번했다. 교대생들은 교사 정원 축소에 반발하며 동맹휴업(수업거부)을 여러 차례 벌였고, 로스쿨생들은 2015년 사법시험 폐지 유예 방침에 항의하며 집단 자퇴서를 내기도 했다.
전국 40곳의 의과대학 학생들은 지난달 20일부터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나섰다. 교육부에 따르면, 의대 재학생(1만8793명)의 70%가 넘는 1만3697명(절차·요건 갖추지 않은 휴학신청 포함)이 참여하고 있다. 의대생 동맹휴학은 선배그룹인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벌어질 때마다 반복되고 있다. 앞서 2020년에도 의대생들은 38일간의 동맹휴학을 벌였다. 의사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집단행동을 벌였고 정부에 대한 입장도 더 강경했다. 정식 의사가 아니지만 국민 건강에 미치는 파장은 작지 않다. 집단 유급으로 신규 의사 양성이 미뤄질 경우, 환자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명분 없는 동맹휴학에 여론이 냉담한 이유다.
황보연 논설위원 whyn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