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강희철│논설위원
큰 선거에는 몇번의 변곡점이 꼭 있다. 지난달 21일도 그런 날일 공산이 크다.
그 휴일의 오후는 ‘윤석열-한동훈 갈등’ 보도로 뒤덮였다.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와 관련한 한의 몇 마디에 분노한 윤이 이관섭 비서실장을 시켜 사퇴를 요구했다고 했다. 곧바로 “약속대련 같다”는 말이 나왔다. 두 사람의 행동 패턴은 정치권보다 옛 검찰 동료들이 더 잘 안다. 요약하면 이런 얘기다.
둘 사이에 이관섭이 끼어 있다. 상식에 반한다. 윤이 한에게 전화 못 할 이유가 있나. 내쫓을 작정이면 직접 통보가 제일 낫다. 한이 ‘노’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진 사퇴의 구실과 모양은 만들면 된다. 그래야 조용히 끝나고 대미지가 적다. 그런데 만천하에 떠들썩하게 추방극을 노출한다? 김기현 내쫓은 지 얼마나 됐다고 공개 자해를 하겠나. 두 사람, 보이는 것보다 영악하다.
몇 사람은 좀 더 나갔다. “며칠 안에 둘이 손잡고 봉합할 거다. 오래 끌다가는 진짜 자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당시 이준석도 비슷한 얘길 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다수 언론은 정반대 예측을 쏟아냈다. “사퇴 요구를 거절했다”는 한의 말을 유력한 근거로 삼아서다. 한의 사퇴로 끝날 거란 전망이 줄을 이었다. 정치권의 오랜 문법에 따르면 그래야 맞다. 하지만 이틀 뒤 윤과 한은 서천 화재 현장에서 악수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열차에 올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한의 귀경사는, 다시 읽어도 의미심장하다. “(대통령과의 갈등설) 그런 말씀은 다 전에 언론을 통해 보도된 것이다.”
약속대련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날 이후 윤 부부를 한 축, 한과 국민의힘을 다른 축으로 하는 ‘디커플링’(탈동조화)이 본격화됐다는 사실이다. 윤의 부정적 이미지는 더 강고해졌으나, 여당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반면, ‘윤의 아바타’로 불리던 한의 이미지는 달라졌다. 대통령 권력에 감히 맞섰다가 겨우 살아남은 2인자로 재포장됐다. 당시 갤럽(1월26일)의 ‘당대표 역할 수행 평가’에도 나타나 있다. 한은 52%의 긍정 평가(부정 40%)를 얻어 이재명(긍정 35%, 부정 59%)을 앞섰다.
설 연휴 직전인 7일 윤은 다시 한번 ‘악역’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방송 신년 대담을 통해서다. ‘명품 백’에 대한 사과, 유감 표명은 끝내 하지 않았다. 실정은 100% 자신의 문제로 가져갔다. 동시에 여당은 더 멀리 밀어냈다. “선거 지휘, 공천에는 관여하지 않겠다.” 총선은 이제 한의 일이 됐다. 설 연휴가 지나자 디커플링 효과는 더 뚜렷해졌다. 의도가 통했다. 국민의힘(42%)은 ‘총선 때 지지 의향’ 조사에서 민주당(36%)에 앞섰다. ‘다수 후보 당선 희망 정당’에서도 민주당을 제쳤다.(갤럽, 지난 16일) 설 연휴를 기점으로 ‘반윤=반여당’ 정서에 불이 붙을 거라던 민주당의 기대는 빗나갔다. ‘정권 심판론’은 되레 흐릿해졌다. 이후 여러 여론조사 추세도 다르지 않다. 민주당은 지난 23일 갤럽의 ‘측면별 정당 이미지’ 조사에서도 4 대 1로 여당에 완패했다.
윤과 한을 얕잡아 봤다. 대선에 지고도 ‘윤나땡’(윤석열 나오면 땡큐), ‘한나땡’을 입에 달고 다녔다. 여의도 정치와 선거엔 초짜라고, 그러니 뭘 하든 패착을 둘 거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잘 아는 이들은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총선 패배는 나락이란 걸 윤과 한도 잘 안다. 그런데 1월 중순까지 상황은 더없이 불리했다. 공멸의 절박한 위기감이 역할 분담으로 이어졌다. 리스크는 전부 윤이 떠안고, 총선은 한의 얼굴로 치르는 고육지계다. 총선은 단기전이다. 두 사람은 과거 특검, 적폐 수사에서 보듯 목표를 정하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만들어낸다. 임기응변, 언론 플레이에도 능하다. 검사 시절 한은 원래 기획·인사가 주전공이었다. 실제 여당 운영은 물론 공천 과정이 별 잡음 없이 관리되고 있는 건 한의 수완이다.
민주당은 여전히 상대편 전략 변화에 무신경하다. 객관적 표심 이동에도 관심이 없다. 자나 깨나 윤만 때리면 총선에서 이긴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 와중에 자기 진영은 사분오열 상태에 빠졌다. 생존 욕망에 사로잡힌 이재명의 자기 당 만들기가 위기를 걷잡을 수 없이 키우고 있다. 일부에선 ‘어게인 2012’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압승 장담으로 시작해 뼈저린 패배로 끝난 12년 전 총선 말이다. 일찌감치 이재명의 대표직 사퇴를 권고한 정세균의 선견지명이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