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니 들머리에도 장애인 학살에 관한 기록물 등 나치의 범죄를 드러내고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설이 마련돼 있다. 독일에서도 어두운 과거사를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각종 시설을 보전 유적지로 조성하고 추모시설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눈에 띄는 도시가 베를린이라고, 독일에서 공부한 이재인 박사는 <사진으로 읽는 베를린>에서 말한다.
베를린 시내 남쪽에 나치 시절 학살당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마치 신기한 놀이터인 양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평소 자신이 사는 주변에서 볼 수 없는 풍광에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베를린/김봉규 선임기자
베를린 시내 남쪽에 나치 시절 학살당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마치 신기한 놀이터인 양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평소 자신이 사는 주변에서 볼 수 없는 풍광에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베를린/김봉규 선임기자
1933년 5월10일 밤 11시, 독일 베를린 베벨 광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2만권 넘는 책들이 불타고 있었다. 나치 친위대와 대학생들이 카를 마르크스, 프란츠 카프카,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유대인 학자와 나치를 비판한 비유대인들의 책까지 모조리 불태우는 분서(焚書·책을 불사라 버림)를 저지른 것이다. 베를린을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뮌헨, 하노버 등 독일 전역 18개 도시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분서는 나치의 유대인 절멸 신호탄이었다. 1995년 베벨 광장에는 ‘분서’를 기억하는 지하 조형물이 만들어졌다. 안내판에는 “책을 불태운 곳에서는 사람도 결국 불태운다”라는 유대인 출신 독일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경구가 새겨져 있다. 1820년에 쓴 그의 비극 <알만조르>에 나오는 대목이다.1992년 유대인 말살을 최종 결정한 ‘반제 회의’가 개최됐던 건물이 ‘반제 회의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유대인 박물관, 홀로코스트 추모 조형물뿐만 아니라 동성애 희생자와 집시 희생자 추모 조형물 등이 베를린 곳곳에 세워졌다. 베를린 필하모니 들머리에도 장애인 학살에 관한 기록물 등 나치의 범죄를 드러내고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설이 마련돼 있다. 독일에서도 어두운 과거사를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각종 시설을 보전 유적지로 조성하고 추모시설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눈에 띄는 도시가 베를린이라고, 독일에서 공부한 이재인 박사는 <사진으로 읽는 베를린>에서 말한다.나치 학살과 관련한 장소를 살펴보기 위해 2017년 4월과 2019년 3월에 베를린을 찾았을 때, 유대인 등이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 등으로 끌려간 안할트역, 그루네발트역, 모아비트역 등 거점 기차역들을 먼저 살폈다. 베를린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루네발트역 17번 선로에서는 1941년 10월18일 유대인을 태우고 아우슈비츠 등으로 끌고 간 첫 기차가 출발했다. 선로 옆으로는 사람들이 끌려간 강제수용소 이름과 인원수가 새겨진 철판이 철길을 따라 기다랗게 설치돼 있었고, 그 위에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하얗고 붉은 장미들이 있었다. 미술기획자 백종옥은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에서 그루네발트역을 두고 “원형을 잘 보존하면서도 의미 있는 기념조형물을 설치한 좋은 사례”라고 설명했다.지금은 열차가 달리지 않는 17번 선로는 검붉게 녹슬어 있었지만, 비가 내려 철길과 철판의 글자들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고풍스럽게 지은 역사에서 잠시 비를 피하면서, 강제수용소행 기차를 기다리던 희생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한 손에는 옷가지 등이 담긴 큰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가족의 손을 꼭 쥔 채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기차는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나치 시절 그루네발트역에서만 5만여명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추모비는 설명하고 있었다.무거운 마음으로 베를린 도심으로 이동해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역 앞을 걸어가는데 어깨에 가방을 메고 인형을 든 아이들 모습의 청동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나치를 피해 영국과 벨기에, 프랑스, 스웨덴 등으로 이주한 유대인 어린이들과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아이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는 모습을 빚은 조형물이었다. 실제 다른 아이들과 고향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살아남게 된 조각가 프랑크 마이슬러가 2008년에 제작한 이 조형물 이름은 <삶으로 가는 기차-죽음으로 가는 기차>였다. 강제수용소로 가는 아이 손에는 장미와 튤립 생화들이 쥐여져 있었다.한참을 살펴보다가 독일 분단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남쪽으로 걸어가니, 이번엔 수많은 콘크리트 블록들이 야트막한 언덕에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나치 시절 학살당한 유대인 600여만명을 기리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였다. 밋밋한 잿빛의 2711개 직육면체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석관묘처럼 생겨, 주변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출입구가 따로 없어 사방이 개방돼 있었고, 어린아이들은 신기한 놀이터인 양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띄엄띄엄 방문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추모비 바로 옆은 주택가여서 묘한 긴장감 같은 게 느껴졌다.수도 중심 한복판에 이런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한국전쟁 전후 대량학살된 100만여명의 영혼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들어서 있는 상상을 하게 됐다. 베를린은 도시 전체가 나치 학살을 기억하는 거대한 기념관이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bong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