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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거는 한겨레] ‘10년의 기다림’과 ‘잃어버린 20년’

등록 :2021-12-26 19:12수정 :2021-12-26 19:26

최우성 | 미디어전략실장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내건 핵심 구호였습니다. 트럼프 시대 4년이 끝난 지금, 이 구호에 빗대 “트럼프가 미국의 주류 미디어(American mainstream media)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옵니다. 주요 레거시미디어(전통 매체)들마다 놀라운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어서죠. 비밀은 디지털 유료구독자 급증에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2016년 대선 시즌 시작 무렵 100만명을 밑돌던 <뉴욕 타임스>의 디지털 유료구독자는 올해 10월 현재 760만명으로 크게 불어났습니다. 2025년까지 1천만명 달성을 목표로 잡았던 게 2019년이었는데, 불과 2년 사이 ‘2030년 1억명’으로 목표치가 바뀌었습니다. 코로나가 덮친 세상에서 유료 콘텐츠에 대한 이용자의 심리적 장벽이 낮아진데다, 무엇보다 트럼프 정부를 겨냥해 집중포화를 퍼부은 영향도 큽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짜뉴스를 쏟아내는 ‘탈진실’의 트럼프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세상에서 ‘믿고 싶은’ 뉴스만 찾아보는 성향을 키운 측면도 부인하기 힘듭니다. 이를 두고 팩트는 사라지고 신조와 편들기가 자리를 꿰찼다며 외려 저널리즘의 후퇴라고 보는 비판적 목소리도 있습니다. 레거시미디어들의 화려한 실적엔 ‘트럼프 효과’라는 특수가 숨어 있다는 얘기죠.

그럼에도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건 디지털 유료구독 모델이 자리잡기까지 주요 레거시미디어들이 보인 노력과 오랜 준비과정 자체입니다. <뉴욕 타임스>의 성공 스토리 뒤엔 잘 알려졌다시피 10년이 넘는 기다림이 가려져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기계학습에 기반한 최적의 지불장벽(페이월) 전략 마련에만 4년을 쏟아부었습니다. 60여개의 변수로 이용자 행태를 분석해 구독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용자를 집중공략했다죠. <애틀랜틱 미디어>는 아예 구독을 유도하는 버튼의 색깔까지 수시로 바꿔가며(A/B 테스트)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디지털 구독모델 전환의 밑그림을 이제 갓 그리기 시작한 한겨레 처지에선 마음이 많이, 무척 급한 게 사실입니다. 올해 시작한 후원회원제를 디딤돌 삼아, 새해엔 좀 더 구체적인 일정표를 짜고 준비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해볼 생각입니다. 돌아보면 거대 포털과 안온한 공존관계를 내심 즐겨왔던 국내 미디어 환경도 국내 언론의 뒤처진 행보에 한몫한 게 분명합니다. 한겨레 역시 이런 냉혹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국내 양대 포털이 뉴스 콘텐츠를 대대적으로 강화한 게 2002년 월드컵과 대선을 앞두고였으니, 어림잡아 20년 남짓한 시간을 흘려보낸 셈이죠. 하지만 익숙했던 기존 질서는 빠르게 허물어지는 중입니다. ‘모든 단단한 것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저 유명한 문구는 2020년대 국내 레거시미디어들에 더없이 딱 어울리는 격언이 될 터입니다.

물론 디지털 구독모델에 이르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테죠. 디지털 구독모델이라고 해서 한계가 없는 것도, 만능해법인 것도 아닙니다. 최근 세계신문협회가 펴낸 ‘2022 뉴스미디어 혁신보고서’를 읽다 보니 지난 1~2년 사이 등장한 다양한 미디어 마케팅 사례들에 유독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더 모르헌>이라는 벨기에 일간지는 다달이 만화경을 앞세운 홍보활동을 펼쳤습니다. 만화경은 혼돈의 시대를 암시하는데, ‘아침을 명쾌하게’라는 일관된 브랜드 전략에 따른 행보였죠. 모르헌(아침)이라는 제호를 최대한 살려낸 것이죠. 아티스트와 협업해 매주 유럽 주요 도시를 번갈아가며 진행한 영국 <가디언 위클리>의 이벤트도 시사하는 바 컸습니다. ‘찾아라’와 ‘명쾌함’이란 단어 사이에 그 주의 가디언 위클리 표지 이미지를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나침반을 잃어버린 혼돈의 시대. 어쩌면 ‘가려내기’(clarify)는 뉴스미디어가 집어든 마지막 숙제이자, 조금 과장하자면 마지막 자존심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명쾌하되 단순하지 않은, 간결하되 앙상하지 않은, 분명하되 치우치지 않는. 모든 걸 0과 1의 외피를 씌워 전달하는 ‘비트의 세계’에서도 레거시미디어가 가야 할 길과 맡아야 할 몫은 분명 있을 테죠. 진정 레거시라면 말이죠.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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