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전 71주년을 맞는 15일 오후 일본 우익들이 일장기와 욱일기를 앞세워 일본의 지난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 71주년을 맞는 15일 오후 일본 우익들이 일장기와 욱일기를 앞세워 일본의 지난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무더운 날이었다. 한국인에겐 광복절, 일본에겐 패전일이 되는 15일 오전 8시. 일본의 지난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추모시설인 도쿄 야스쿠니신사로 이어지는 도쿄 구단시타역 1번 출구를 나서자, 눈 앞에 구름과 같은 인파의 행렬이 나타났다.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찌라시를 나눠주는 활동가, 한국 등 주변국으로부터 역사왜곡 교과서란 비판을 받고 있는 우익 교과서를 만드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선전용 부스, 일본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받으려는 노인,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정당하고 옳은 전쟁’이란 피켓을 든 젊은이들도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신사를 참배하려는 일본인들의 행렬은 이미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신사로 접어드는 첫번째 도리이(신사의 경계를 표시하는 문)를 지나자 저만치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눈에 띄었다. 거기서 다시 두번째 도리이를 지나자 우악스런 군복을 입은 이들이 “천황폐하를 중심으로 단결하자” “난징대학살은 조작된 얘기”란 깃발을 높이 내걸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들이 ‘대일본신민숙’ ‘동지회’ 등의 글자가 박힌 옷을 입고 욱일기를 앞세워 경내를 활보했다. 이들에게 신사 방문의 이유를 묻자 “조선인은 꺼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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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하루 온종일 참배를 하는 일본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일반 시민들이 참배를 하는 배전 앞에서 참배를 하는 일본 시민들의 모습
15일 하루 온종일 참배를 하는 일본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일반 시민들이 참배를 하는 배전 앞에서 참배를 하는 일본 시민들의 모습

오전 10시께로 접어들자 특별 참배객을 맞이하는 신사의 ‘도착전’ 앞으로 일본 정치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2011년 8월 한국 울릉도를 방문하겠다고 김포공항에서 떼를 쓰다 입국이 불허된 신도 요시타카 전 총무상이 가족을 이끌고 참배했다. 신도 전 총무상의 얼굴을 알아본 지지자들이 “신도 선생, 감사합니다. 힘 내세요”라는 격려의 인사를 보냈다.

현직 아베 내각의 각료 가운데선 이마무라 마사히로 부흥상이 11일, 다카이치 사나에 총무상, 마루카와 다마요 올림픽상, 하기우다 고이치 내각관방 부장관 등이 15일 당일 참배를 강행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신사를 직접 방문하는 대신 대리인을 보내 ‘자민당 총재’라는 직함으로 공물료를 납부했다. 참배 여부를 두고 관심이 집중됐던 이나다 도모미 방위상은 아프리카로 출장을 떠나며 자신의 참배를 둘러싼 논란을 회피했다. 이날 신사를 참배한 일본 현직 의원은 70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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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들의 참배가 이어지던 무렵인 오전 11시 신사 경내 다른 한쪽에선 일본 우익의 총본산인 ‘일본회의’ 등이 주최한 ‘전몰자 추도 중앙국민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연사로 나선 도쿠나가 신이치 변호사는 “일본군이 전쟁 중 조선 여성을 강제연행을 하고, 위안소로 보내 성노예로 삼고, 전쟁이 끝난 뒤 모두 죽였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얘기다. 한국인들은 안타깝게도 이를 사실이라 믿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저곳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 총무상을 지난 신도 요시타카 의원이 가족들과 함께 신사 참배를 준비하고 있다. 지지자들의 함성에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
일본 총무상을 지난 신도 요시타카 의원이 가족들과 함께 신사 참배를 준비하고 있다. 지지자들의 함성에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

신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일본무도관에선 제71회 전국전몰자추도식이 열렸다. 아베 총리는 이날 추도사에서 “전쟁의 참화를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부전의 맹세를 언급했지만, 역대 총리들과 달리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대한 가해의 책임이나 그에 대한 ‘깊은 반성’과 ‘추도의 뜻’은 4년 연속 입에 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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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되자 최근 ‘생전퇴위’ 의사를 밝힌 일왕의 추모사가 스피커를 타고 신사 경내에 울려 퍼졌다. 일장기와 욱일기를 든 이들이 기립을 하고 일왕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일왕은 “여기서, 과거를 돌아보고 깊은 반성과 함께 이후 전쟁의 참화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을 절실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일왕이 신사를 참배해야 일본이 진정으로 독립을 이루는 것”이라고 외쳤지만, 일왕이 언급한 ‘깊은 반성’이란 단어를 곱씹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8월15일 야스쿠니신사에는 욱일기와 일장기를 든 우익들이 군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8월15일 야스쿠니신사에는 욱일기와 일장기를 든 우익들이 군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외교부는 이날 오후 대변인 논평을 내 “일본 정부 및 의회의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일본의 침략전쟁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또다시 공물료를 봉납하고 참배를 강행한 것에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한다”며 “일본의 정치인들이 역사를 용기 있게 직시하고 과거사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진정한 반성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대의 귀청을 때리지 못할 무력한 메시지였다. 지독히 ‘자기 중심적’인 이 무례하고 거대한 일본이라는 이웃과 어떻게 사귀어가야 할까. 아베 정권 4년이 지나는 동안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시아의 평화’는 이전보다 한발 더 멀어진 느낌이다.

일본 우익들이 15일 정오가 되자 신사 배전을 향해 묵도를 올리고 있다.
일본 우익들이 15일 정오가 되자 신사 배전을 향해 묵도를 올리고 있다.

도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이제훈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