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출신 언론인이 “부당한 인종주의 비난을 받았다”며 방송 프로그램에서 중도 하차하면서 이 나라를 둘러싼 해묵은 인종주의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공영 방송인 <오스트레일리아 방송국>(ABC)의 시사프로그램 ‘큐플러스에이’(Q+A) 진행자인 스탠 그랜트는 지난 20일 회사 누리집에 영국왕 찰스 3세 대관식 보도 때 과거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가한 폭력에 대해 언급한 뒤 “무자비한” 인종주의적 비난을 받았다고 말했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현재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22일 이 프로그램에 마지막으로 나와 소셜미디어와 몇몇 보수언론이 자신을 왜곡했다며 “나와 우리 가족을 괴롭힌 이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의 목표가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라면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내 누구도 심지어 대관식 보도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던 사람들도 공개적으로 나를 방어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도 밝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위라주리 족 출신인 그랜트는 1992년 원주민으론 처음 오스트레일리아 주요 시간대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어 주목 받았다. 이후 <시엔엔>(CNN)과 <알자지라> 등을 거쳐 2019년부터 다시 방송국에 돌아와 활동해온 30여년 경력의 언론인이다.
그는 이달 초 영국 왕 찰스 3세 대관식을 보도하며 과거 영국이 왕의 이름으로 어떻게 원주민을 “몰살하기 위한 전쟁”을 선언했는지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관식 행사는) 멀리서 벌어지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고 무게감 없는 요식행위가 아니다”면서 이 행사가 “원주민에게는 무겁게 다가온다. 왕관의 무게가 지금도 우리를 누르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견뎌내고 있다”고 말했다.
보도 뒤 내용이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는 시청자의 불만이 쏟아졌다. 한 유명한 라디오 진행자는 보도 내용이 “완전히 분위기를 오도했고 증오에 차 있다”고 비판했다. “쓸데없는 불평불만 늘어놓기”, “악다구니”라고 헐뜯는 의견도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스스로 다문화사회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다양성이란 관점에서 정부·언론·방송계 구성을 보면, 유럽이나 미국 등 다른 서구 사회에 견줘 훨씬 뒤처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 <비비시>(BBC)는 2022년 조사를 인용해 오스트레일리아 텔레비전 방송 기자와 프로그램 진행자의 70~80%가 영국계 문화권 출신이라고 전했다.
그랜트의 사퇴는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의 인종주의에 다시 한번 큰 경종을 울리고 있다. 동료 언론인은 “나는 스탠과 함께 한다”며 그랜트를 지지하는 항의 집회를 열었다. 원주민 눙가 족 출신 텔레비전 언론인 나렐다 제이콥스는 “이번 그랜트의 사례는 원주민 출신 언론인이 주류 시각에 도전하기 위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며 “이 나라 언론은 균형을 잃고 있으며 그랜트가 이를 바로잡으려다 공격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번 사태는 원주민의 피로 얼룩진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난 역사가 여전히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방송국은 이번 일에 대해 사과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겠다고 약속했다. 이 방송의 보도 책임자인 저스틴 스티븐스는 “그가 우리 조직에서 겪은 좌절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방송국은 회사 내 인종주의를 어떻게 다룰지 검토하고 사내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올해 말 원주민 문제에 대해 정부에 조언하는 조직을 헌법 기구로 할지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