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는 20세기 국제정치사에서 손으로 꼽을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당시 세계를 지배한 냉전적 질서와 사고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중국은 ‘악의 제국’ 소련과 다를 바 없었다. 한국전쟁 때 직접 싸웠다는 점에서는 소련보다 더한 존재였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강국으로 부상한 이래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미국이 이 전쟁에 뛰어든 배경에는 1949년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자 제기된 ‘중국 상실’에 대한 비판론도 있었다. ‘도미노 이론’에 사로잡힌 미국은 베트남전에 끼어들어 공산주의 확장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중국도 1950년대 대만해협 위기 때 핵 공격 위협까지 가한 미국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절박한 필요가 상황을 뒤집었다. ‘명예로운 종전’으로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싶은 미국은 북베트남을 후원하는 중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중국과 친해진다면 소련 포위망을 강화하는 일석이조도 노릴 수 있었다. 리처드 닉슨은 대통령 당선 1년여 전인 1967년 10월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가장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을 수 있는 10억 인구가 분노의 고립 속에 살아갈 공간은 이 작은 지구에 없다”며 중국에 신호를 보냈다. 매카시즘 추종자였던 닉슨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1960년대를 거치며 중국도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위에서 소련이 누르고, 옆에서 인도가 찌르고, 밑에서는 베트남에 진주한 미군이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동쪽에는 일본이 있으니 사방이 포위됐다고 생각했다. 특히 1969년 우수리강에 이어 신장에서 중국군이 소련군과 충돌해 큰 피해를 입은 국경 분쟁은 중-소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놨다.
미-중은 1969년 11월부터 입질을 시작했다. 이는 1971년 핑퐁 외교와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베이징 비밀 방문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관계 정상화는 되돌릴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워터 게이트로 인한 닉슨의 사임, 베트남전 종전, 대만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미국 여론 등으로 정식 수교는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9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