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 200여구가 곧 송환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고리로 북-미 간 신뢰 관계 구축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유해 송환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2일 합의한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첫 이행이라 향후 북-미 간 비핵화 및 상응 조처 논의를 위한 긍정적인 분위기 조성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군 유해 발굴·송환은 가족에게 유해를 돌려준다는 ‘인도주의적 사업’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미 관계의 정치적 풍향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왔다. 해빙기를 맞으면 신뢰 구축 조처로 가장 먼저 거론됐지만, 냉각기에 빠지면 바로 중단됐다.
예를 들어 1996~2005년 북-미 합동 조사단은 북한 지역에서 2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러나 조지 부시 행정부 들어 북-미 관계가 악화되자 북한에 파견된 발굴 요원들의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와 북한에 현금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활동이 중단됐다. 2007년 빌 리처드슨 당시 뉴멕시코 주지사에게 6구를 인도한 것이 마지막 유해 송환이었다. 양국은 2011년 10월 타이 방콕에서 유해 발굴 재개에 합의했지만, 이듬해 4월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하면서 이행되지 않았다.
이번에 송환될 유해 200여구는 지난 몇년간 북한이 자체적으로 발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고 이미 확인된 유해는 조속히 송환한다는 북-미 정상 공동성명 조항에서 ‘기 발굴 유해의 송환’에 해당한다. ‘향후 발굴 사업’도 본격화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는 한국전쟁 때 실종된 미군은 총 7697명이며, 이 가운데 전사해 북한 땅에 묻힌 유해가 5300구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유해 발굴은 인도적 명분 외에도 적대 관계를 청산한다는 상징적 효과도 적지 않다. 미군 군용기가 평양 공항에서 성조기로 감싼 유해를 싣고 가거나 판문점 육로로 송환하는 행사 자체가 전쟁의 상흔을 씻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군은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과 라오스에서도 공동 유해 수습 활동을 벌였다.
발굴 사업이 본격화되면 북-미 간 긴장이 크게 낮아지는 정치적 효과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수십명의 미군 병력과 전문가가 북한 현장에서 작업하면, 아주 낮은 수준이지만 미군과 북한 인민군 간에 대화 채널을 열게 된다. 발굴 기간엔 평양에 미군 연락장교가 머물며 매일 미군 당국에 보고하게 된다.
일부에선 발굴 과정에서 인력과 자재 제공 대가로 미국이 북한에 현금을 지급하는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대북 제재와 무관할 뿐 아니라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유해 발굴을 하려면 격전지였던 험한 산악 지역을 누벼야 하므로 현지 지형을 잘 아는 북한 주민이나 군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미국 의회조사국이 2005년 5월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미국 국방부가 1993년부터 유해 수습을 위해 북한에 지급한 돈은 2800만달러(약 311억원)에 이른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