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기도, 그냥 비를 맞기도 애매하다. 수은주는 영하권으로 곤두박질쳤다. 두꺼운 파카와 털모자를 쓴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대부분 히스패닉·흑인 등 ‘유색인종’들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각) 오전 11시, 미국 워싱턴 시내의 ‘메트로폴리탄 아프리칸 감리(AME) 교회’에선 20일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반이민자’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교회 1, 2층이 모두 미 전역에서 온 2천여명의 참석자로 꽉 찼다. 교회 난간에는 “여기가 우리 집이다”, “가족을 지키자”라고 쓰인 펼침막이 곳곳에 걸려 있다.

이 교회는 ‘흑백 분리 반대운동’에 힘입어 1838년 백악관 근처에 세워진 워싱턴의 유서 깊은 흑인 교회다. 179년 전 소수자 배척에 항의했던 역사의 아픈 기억이 ‘트럼프 시대’에 다시 소환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2시간여의 집회 동안 교회 안은 이민자들의 걱정과 분노, 비장함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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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트럼프 당선자의 반이민자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린 미국 워싱턴의 ‘메트로폴리탄 아프리칸 감리 교회’에 시민 2천여명이 모여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14일 트럼프 당선자의 반이민자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린 미국 워싱턴의 ‘메트로폴리탄 아프리칸 감리 교회’에 시민 2천여명이 모여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불법 이민자 추방’이라는 트럼프의 엄포 때문에 한시적이나마 합법적 이민자 지위를 누리고 있는 ‘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DACA·다카) 프로그램 혜택자들도 조마조마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012년 행정명령으로 시행된 다카 프로그램은, 시행 당시 ‘2007년 6월15일 이전, 부모를 따라, 16살 이전에 미국에 온, 30살 미만 청소년’ 이민자들에게 합법적으로 일할 권리를 부여했다. 현재 75만명가량이 혜택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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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통령 권한인 행정명령은 새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트럼프 내각엔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 후보자 등 ‘반이민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다카 혜택을 받기 위해 모든 개인정보를 등록한 ‘청소년 이민자’들은, 그 정보가 이젠 자신을 추방하는 칼날로 돌아올까봐 마음을 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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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카 빌야로보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안젤리카 빌야로보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집회에서 만난 안젤리카 빌야로보스(31·사진)도 다카 혜택자 가운데 한명이다. 10살 때 가족과 함께 멕시코를 떠나 ‘불법으로’ 미국에 건너온 빌야로보스는 다카 혜택을 받으면서 삶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다카 전에는 불법 상태라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웠고, 미국에선 신분증과 마찬가지인 운전면허증도 발급받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경찰이나 이민국 직원에 적발돼 추방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늘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다카 이후, “식당 시급이 7.5달러에서 13달러로 올랐고”, 운전면허도 발급받았다. 지금은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근무한다. 다카가 폐지되면, 다카 혜택을 받고 있는 그와 그의 남편은 둘 다 당장 미국을 떠나야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자인 아이들과도 생이별해야 한다. 그는 “멕시코 상황이 너무 어려워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다. 8살과 9살, 두 아이가 많이 두려워한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조너선 히메네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조너선 히메네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에콰도르에서 4살 때 미국으로 온 조너선 히메네스(22·사진)도 다카로 뉴욕 퀸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 2학년생인 그는 노동허가를 받게 돼 “일하면서 공부도 하고, 태권도도 배우고 있다”며 “다카가 내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가 ‘다카를 폐지할 것 같냐’는 질문에 “이럴 때는 이렇게 얘기하고, 어떤 때는 저렇게 얘기한다”며 “하지만 (트럼프가) 폐지하게 (우리가)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다카 폐지는 내 인생 전반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미주 한인 봉사 교육단체 협의회’의 윤대중 사무국장은 “한인 청소년들도 8천~9천명이 다카 혜택자로 파악된다”며 “다카는 2년마다 갱신하게 돼 있는데, 트럼프 행정부가 갱신을 해주지 않거나 아예 폐지하는 것 둘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윤 국장은 “다카뿐 아니라 서류미비(불법) 한인 이민자가 23만명에 이른다”며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느냐’, ‘추방당하거나 검문당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문의 전화가 많이 온다”고 안타까워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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