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버지니아라는 얘기를 들고 이민 간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뒤 총격사건을 저지른 아이의 이름이 익숙했다. 외손주 ‘승희’와 이름이 같았는데 신문 속에서 본 손주의 모습은 낯설었다.
김씨가 승희를 마지막 본 건 15년전 미국에 이민을 갈 때였다. 사진 속 그 아이가 ‘내 손주가 맞나’ 한참을 긴가민가 했다. 수줍음이 많아 “할아버지” 부르며 달려와 한 번 안길 줄도 몰랐던 외손주 승희가 한 명도 아닌, 33명이나 죽였단다. 믿어지지 않았다. ‘똑소리 나던 제 누나와 달리, 말을 못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걱정을 시키더니 결국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수줍음 많아 안길줄도 모르던 손주 승희가 그런일을…’
버지니아공대 총기사건이 난 지 이틀이 지난 18일 오후 10시, <한겨레> 기자는 조승희(23)씨의 외할아버지 김아무개(81)씨의 경기 고양시의 집을 찾았다. 김씨의 집은 흥청망청 불빛이 환하게 밝은 아파트촌 옆 산기슭에 세운 비닐하우스였다. 김씨는 이 비닐하우스에서 텃밭을 가꾸며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정갈하게 정리된 김씨의 방안에는 뉴스 화면이 소리를 죽인 채 틀어져 있었다.
“뉴스에서 자꾸 딸과 사위가 죽었네, 살았네 얘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텔레비전을 틀어놨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방 한쪽 탁자에는 신문이 흐트러진 채 엎어져 있었다. 뒤편에는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 범인은 한국인’이라는 제목이 큰 글자로 뽑혀 있었다. 그는 “자식들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어렵게 미국까지 갔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어두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김씨는 “뉴스를 듣고 답답한 마음에 기차를 타고 임진강에 다녀왔다”고 했다. 실향민인 김씨는 북쪽을 바라보며 착찹한 마음으로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왔다고 했다. “위와 장이 안 좋아서 이젠 소주는 마시지도 못한다”며 쓸쓸하게 얘기했다.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오래 살다보니 이런 모습까지 본다”며 김씨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자식들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어렵게 미국까지 간 것”
조씨 부부는 미국에 이민을 가기 전까지 서울 홍은동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고 한다. “사위가 총각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돈을 벌어온 걸 밑천으로 코딱지만한 가게를 한 거야.” 돈 벌어오느라 때가 늦은 조씨와 29살 혼기를 꽉채운 딸 향임씨는 중매로 결혼을 했단다. 늦게 얻은 자식인만큼 사위 조씨의 자식 사랑은 각별했다. “그저 새끼라면 어쩔 줄 몰라 했던 사람”이라며 “금지옥엽으로 키운 자식이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두 내외가 살아도 산 게 아니다”며 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우디아라비아서 벌어온 돈으로 서울 홍은동에서 헌책방 운영
조씨 부부는 형편은 빠듯했지만 바지런히 일해 작은 집도 장만하고 잘 살았다. 그러던 중 미국에 있던 조씨의 가족들의 초청으로 미국 이민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미국에 가면 애들 교육을 잘 시킬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민도 쉽게 가진 못했다. 당장 떠날줄 알고 전재산인 집을 팔았지만, “급행료를 주지 않아서 그랬는지” 8년이나 늦어졌다. 결국 있는 돈 솔솔 까먹다가 몇 푼 못 쥐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려운 형편에 오직 공부 잘하는 두 자식들이 자랑
미국에 간 뒤에도 조씨 부부의 생활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고 한다. 명절이 돼야 “잘 살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올 뿐이었다. 알뜰한 딸은 “전화요금이 아깝다”고 길게도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다. 한국서 살림만하던 딸은 남편과 함께 세탁소에서 밤낮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일이 힘들 때마다 어릴 적 교통사고로 다친 어깨죽지가 아프다”고 했단다.
김씨는 “12년 전 제 어미가 죽을 때도 오질 못한 딸이었다”며 김씨는 딸네 부부의 힘겨운 삶을 전했다. 그래도 부부에게는 공부를 잘 하는 두 자식들이 자랑이었다. 김씨는 “외손녀가 공부를 잘 해 하버드대에도 합격했는데 장학금이 적어 프린스턴대에 가게 됐다”는 등의 소식을 전할 때면 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승희는 잘 지내니?” 김씨의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잘 있다”는 말뿐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살아도 산게 아닐 것”
김씨와의 통화 도중 김씨의 또 다른 딸(49)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의 생사를 물었던 듯, 김씨는 “뉴스에선 살았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하는데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부부도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한 뒤 전화를 걸어온 큰 아들(53)은 “불쌍한 우리 누나 고생만 하다가 이렇게 죽어서 어쩌냐”며 엉엉 울었다고 했다. 김씨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이러났는지 모르겠다”며 “모쪼록 두 부부가 살아있기만 바랄 뿐”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닐 것”이라는 김씨의 한숨이 길었다. 이정애 기자 신소영 수습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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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 외할아버지 “자식들 잘 키우려고 미국까지 갔는데…”
조씨 부부 서울서 헌책방 운영…친척들 초청으로 미국행
“수줍음 많던 손주 승희가 그런 일을 했다니 믿어지지가…”
- 수정 2019-10-19 20:29
- 등록 2007-04-19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