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관리 정책이 ‘적극적 예방’으로 방향을 튼다. 1985년 국내 첫 HIV 감염 사례가 보고된 지 40년 만이다. 이는 정부가 의학적으로 증명된 예방법인 ‘프렙’(PrEP, HIV 노출 전 예방요법)을 적극 보급함으로써 HIV를 사회적으로 회피하거나 고립시키는 편견과 낙인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질병관리청 유정희 에이즈관리과장은 지난 16일 사단법인 신나는센터가 개최한 제5회 프라이드 갈라 포럼에서 정부의 ‘프렙 지원사업 확대 계획’을 공유했다. 올해부터 프렙 지원사업을 전국 단위로 확대 시행해 예방 중심의 HIV 관리 정책을 본격화하겠다는 계획이다.
프렙은 첫 2세대 HIV 치료제인 길리어드사이언스의 ‘트루바다’가 2004년 미국에서 승인된 후 HIV 치료 성과가 크게 개선되면서 제안된 예방법이다. 해당 계열의 치료제는 큰 부작용 없이도 감염인의 혈중 바이러스 활성화를 효과적으로 억제해 질병적 증상까지 발현하지 않도록 돕는다. 이 때문에 과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라는 질병명은 단순한 바이러스명인 ‘HIV’로 교체됐으며 치료 패러다임도 생존을 넘어 삶의 질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예방을 위해 이를 투약하는 방안도 제안됐다.
그 결과, HIV 노출 사후 예방(PEP·펩) 효과뿐 아니라 사전에 감염 취약군이 하루 한 알씩 꾸준히 복용하면 HIV 감염 위험도가 90% 이상 감소한다는 사실도 임상적으로 확인하며 프렙 요법이 공식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감염인의 혈중 HIV 바이러스 수치(바이러스의 활성화)를 일정 기준 이하로 억제하면 타인에게 전파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개념도 의과학적으로 확립했다. 이후 최대 99.6% 수준의 높은 감염 예방률을 증명한 프렙 요법을 미국 정부가 2012년 공식 허가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2017년 트루바다를 세계 첫 HIV 예방약으로 지정했다.

국내에서도 대한에이즈학회가 관련 가이드라인을 세우며 소개됐지만, HIV에 대한 사회적 편견 탓에 10년 가까이 제대로 확산되지 못했다. 의료기관 처방 요건(HIV 감염인의 성관계 파트너)과 절차가 엄격하고 까다로운데다 많은 당사자가 아우팅(타인의 신분이나 성향을 본인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누설하는 일) 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HIV에 대한 관심과 공개적 담론을 회피한 결과, 확실한 예방법이 존재함에도 효과적인 HIV 예방·관리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국내에선 여전히 한 해 1천 명 내외의 신규 감염 사례가 보고되며 감염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지난해엔 HIV 신규 감염인(1005명, 전년 대비 5.7% 감소)의 79.8%(802명)가 20~40대에 집중되기도 했다.
이에 질병청은 지난해 말부터 서울과 부산 등 일부 지역에서 프렙 지원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HIV 감염인의 파트너, 남성과 성관계하는 남성(MSM), 또는 트랜스 여성, 고위험 직업군(유흥업소 종사자) 등 성별과 성지향성에 상관없이 참여를 신청한 감염 취약군을 대상으로 HIV 검사비와 프렙 처방 전 검사(신장 기능 및 B·C형 간염 검사 등) 비용, 약제비의 본인 부담금 일부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올해부턴 시행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지난 1~3월에만 참여 의료기관이 120여 곳으로 늘었다.
이를 통해 그간 경제적 부담으로 프렙 요법을 적극 시행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감염 보호 사례가 크게 늘 것으로 기대된다. 의료기관에서 한 번 처방받을 때 적게는 약 12만원 이상의 약제비가 발생하는데, 해당 사업의 지원을 받으면 월 6만원 수준으로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 국내에서 지난 몇 년간 국외에서 저렴한 복제약을 불법 구입하는 상황이 더욱 성행하고 있는데, 질병관리청 지원사업을 통해 공식 처방받는 비용과 불법으로 구입하는 비용이 거의 같아서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불법 구입을 시도할 이유가 사실상 사라졌다. 해당 약제는 전문가의 정확한 처방과 복약 지도, 그리고 사전 검사가 필요한 의약품이기에 이러한 비공식적인 약물 유통 경로는 복용자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
유정희 과장은 “해당 사업으로 2030년까지 신규 HIV 감염 사례를 현재보다 30~40% 낮추는 한편, HIV 감염인의 생존 기간이 연장되며 늘어나는 정부의 의료비 부담도 효과적으로 절감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프렙 처방 의료기관을 확대해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프렙에 대한 이해를 확산시키기 위한 대중 캠페인과 정보 제공을 강화하겠다”며 “향후 프렙의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제약사와의 협력을 통해 약값 인하를 시도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HIV 감염인 및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과 의료 현장의 인식 제고와 임상지침 등의 전문성 강화 등도 약속했다.

박정완 순천향대 천안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프렙은 HIV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보다 폭넓은 인식과 접근이 필요하다”며 “HIV 음성인 경우, 약 7일 이상 지속적으로 복용한 이후 예방 효과가 발생하며 감염 여부나 신장 및 간 기능 상태 등에 따라선 복용시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반드시 의료기관을 방문해 전문 의료진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날 현장에 참석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질병청의 해당 사업 확대 방침에 환영하는 목소리를 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소수자 집단 등을 중심으로 HIV 예방 활동을 시행하는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홍민욱 아이샵(iSHAP) 검진상담실장은 “오프라인 교육 캠페인 전후 프렙 복용 의향이 47%에서 73.8%로 크게 높아지는 등 인식과 수용도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MSM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프렙 정보 제공과 교육 활동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공개 커밍아웃 25주년을 맞아 이날 ‘올해의 프라이드 어워드’를 받은 방송인 홍석천씨 역시 수상 소감에서 마약 예방 및 콘돔·프렙 사용 독려 캠페인(노 드러그, 예스 콘돔, 유즈 프렙)을 개인적으로도 전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동료와 후배들에게 조언하던 개인 캠페인에 프렙 요법을 추가한 것이다.
한편, 해당 사업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참여 신청은 아이샵 누리집(https://www.ishap.org/content/prevention_05)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지현 기자 jhcho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