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아이폰을 자기 수리 키트를 이용해 수리하는 모습. 애플 누리집 갈무리
애플의 아이폰을 자기 수리 키트를 이용해 수리하는 모습. 애플 누리집 갈무리

“아이폰12의 카메라 보호유리가 깨졌는데, 유리만 교체하면 4만원이면 되는데, 부품이 없다. 이 때문에 70만원 넘게 주고 리퍼폰을 사야만 한다.”(서울 구로의 사설 수리점 관계자)

“(애플의) 셀프 서비스 수리는 미국에서 제공되고 있고, 2022년 말 유럽을 시작으로 다른 국가로 확대될 예정이다.”(애플 뉴스룸)

애플이 오는 3월부터 아이폰13과 이전 모델의 배터리 교체 비용을 기존 7만9200원에서 3만4천원 인상하기로 하면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수리할 권리는 일정 기간 부품 단종을 금지하고 사설 수리센터를 통한 수리도 허가해,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자원 절약을 통한 ‘탄소 중립 ’에도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미국과 유럽연합 (EU )에선 관련 법안이 제정되는 등 권리 보장이 확산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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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애플과 삼성전자는 일부 국가에서 자사 휴대전화와 노트북 일부 기종의 정품 부품과 수리 도구(키트)를 별도로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애플은 미국과 유럽연합(EU) 8개국에서만, 삼성전자는 미국에서만 이를 시행 중이다. 엘지(LG)전자는 유럽에서 일부 가전제품에 대해 시행중이다.

애플과 삼성전자가 수리할 권리 보장 활동을 펼치는 것은 관련 법률 시행 영향이 크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행정명령을 통해 소비자의 자체 수리 권한을 보장하도록 했고, 뉴욕주는 지난해 12월 이를 의무화하는 ‘디지털 공정 수리법(the Digital Fair Repair Act)’를 제정했다. 영국 역시 2021년 이와 유사한 법을 제정했고, 유럽연합은 2020년 신순환경제 실행계획을 발표하면서 5개 제품군에 대해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했다. 비영리기관 유럽환경국에 따르면,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매년 210만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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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지난 1월 미국에서 자기 수리 대상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누리집 갈무리
삼성전자는 지난 1월 미국에서 자기 수리 대상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누리집 갈무리

애플은 지난해 4월 아이폰12·13과 맥북 등을 소비자가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매뉴얼과 부품, 수리 도구 등의 공급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올 1월 기준으로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를 시행 중이다. 유럽의 수리할 권리 시민단체는 제품군은 물론 대상 국가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언제 시행될 것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서울 여의도의 한 사설 수리점 관계자는 “애플이 자사 정품 부품을 공급하지 않아 새 아이폰을 분해한 정품이나 중국에서 유사품을 사서 고친다”며 “국내에선 애플 인증 수리점을 가도 배터리나 액정 교체를 빼고는 작은 부품이 고장 나도 통째로 바꿔야 해 소비자 부담이 크고, 이 때문에 아예 새 휴대폰으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1월 미국에서 시행 중인 자기 수리 프로그램에 갤럭시에스(S)22 시리즈와 갤럭시북 프로 등을 추가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은 갤럭시에스20·21 시리즈를 대상으로 해왔다. 자가 수리 방법 공유 사이트 ‘아이픽스잇(iFixit)’은 갤럭시에스21의 정품 액정·배터리와 수리 기구를 묶어 167.99달러(22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직접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과 기술 수준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 비교가 어렵지만, 국내 삼성전자 서비스센터를 이용하면 액정을 교체하는 데만도 31만9천원(미반납 기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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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서도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 제정안이 발의됐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2021년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공약으로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는 과도한 규제로 제조산업의 혁신동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며, 공정거래위원회는 광범위한 수리권 심사 등에 과도한 행정 비용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도 적극적이지 않다. 노태문 삼성전자 엠엑스(MX)사업부장은 지난해 국회에서 “미국과 한국은 환경이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대면 수리점이 가까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엘지전자도 같은 입장이다. 이에 대해 강은미 의원은 “수리를 어렵게 만들어놓으면 제품 수명이 짧아져 소비자는 부담이 커지고 제품 생산과 폐기물이 늘어 환경피해는 더 확산된다”며 “소비자가 수리점을 방문하거나 직접 수리할지를 두고 선택할 수 있도록,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이 제정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