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애플은 인권단체들의 압력에 협력사들의 노동여건과 인권보호 의무 준수를 밝힌 누리집을 만들고 부품 공급업체 156곳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업체들이 밝혀졌는데, 관심을 끌었던 미국의 유리제조회사 코닝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로써 아이폰 디스플레이에 코닝의 고릴라글래스가 사용되었는지를 둘러싼 오랜 논쟁도 끝났다. 아이폰 사용자들은 쉽게 깨지는 아이폰의 유리 화면이 견고함으로 이름난 고릴라글래스인지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명단에는 중국 선전에 있는 렌즈원 테크놀로지가 들어 있었다. 렌즈원은 2006년 세워진 직원 9500명 규모의 회사로, 휴대전화 화면용 유리를 만들어 노키아, 모토롤라 등 주요 업체들에 납품해왔다.

집요할 정도로 높은 품질을 추구한다는 애플은 왜 견고하다는 고릴라 대신 중국산 유리를 아이폰에 채택했을까? <뉴욕 타임스>는 지난 21일치에 심층취재 기사 ‘미국은 왜 아이폰 제조를 못하게 됐는가’를 실어, 그 배경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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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 기사를 보면, 2007년 아이폰 출시를 한달가량 앞두고 시제품을 써보던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개발자들을 불러 불호령을 내렸다. 잡스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열쇠와 함께 꺼낸 아이폰의 플라스틱 화면엔 열쇠에 긁힌 흠집이 선명했다. 잡스는 “난 흠집나는 제품은 안 판다”며 “유리 화면으로 설계를 바꿀 것, 6주 안에 완벽하게”라고 요구했다. 애플 임원은 잡스의 지시 직후 중국 선전으로 날아갔다. 잡스가 요구한 조건을 충족시킬 곳은 그곳뿐이었다. 애플은 코닝을 유리부품 공급사로 이미 선택해놓은 상태였지만, 양산에 필요한 공간과 테스트, 중간 숙련도의 기술진 등의 조건을 코닝이 만족시킬 수 없었다. 애플 임원이 만난 중국 업체는 이미 새 건물을 짓고 있었고, 테스트에 필요한 샘플과 기술진을 거의 공짜로 쓰게 해줬다. 이 업체는 공장 기숙사가 있어 24시간 아무 때나 작업을 시킬 수도 있었다. 애플은 이 회사와 계약했다.

애플 기술진이 한달여 실험 끝에 아이폰용 강화유리 절단기술을 개발해낸 2007년 중반, 강화유리 부품이 트럭에 실려 8시간 거리에 있는 폭스콘 공장에 도착했다. 자정 무렵이었지만 관리자들은 기숙사 직원 8000여명을 깨워 과자 한조각과 음료만을 제공하고 30분의 준비시간 뒤에 곧바로 작업에 투입했다. 96시간 만에 공장은 하루 1만대의 아이폰을 생산하게 됐고, 애플은 석달 동안 100만대의 아이폰을 판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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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를 밝힌 애플 전 임원은 “빠르기와 유연성이 놀라울 정도였다”며 “미국엔 이에 맞설 수 있는 공장이 없다”고 단언했다. 지난해 2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실리콘밸리에서 정보기술업계의 주요 인사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잡스에게 “왜 아이폰이 미국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지”를 물었다. 당시 잡스는 “그런 일자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저함 없이 말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단지 낮은 인건비 때문이 아니라, 공장의 빠른 속도와 유연성, 노동자들의 숙련도 측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서기 때문이라는 게 애플 경영진의 견해다. 애플의 제품 조달 매니저를 지낸 제니퍼 리고니는 “폭스콘은 하룻밤새 3000명을 채용할 수 있다”며 “미국에선 이런 채용 규모와, 그들을 기숙사에 살게 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애플의 매출은 1080억달러로, 미시간, 뉴저지, 매사추세츠 3개주의 예산 총액을 넘어설 정도였지만, 제조의 국외 의존으로 인해 국내 고용 유발효과가 매우 낮다.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를 보면, 자동차 제조에서 1000개의 일자리는 4712개의 연관 일자리를 추가로 만들어내지만, 1000개의 병원 일자리는 672개를 만들 뿐이다. 물류, 창고, 부품 제조 등 연관 일자리가 줄어들고, 결국은 중산층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게 미국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내 제조업체들도 속도와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엘지(LG)전자 등은 연구개발진에 기숙사를 제공해 속도를 내고 있으며,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기 위해 수시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2009년 5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래 직장의 변화’로 ‘빠른 속도와 높은 유연성, 그리고 높은 스트레스’를 예고했다. 생존을 위한 속도와 유연성이 높은 스트레스로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