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이 3월부터 서울 은평구의 한 중학교에서 서울시와 함께 진행중인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친구명찰’ 캠페인. 제일기획 제공
제일기획이 3월부터 서울 은평구의 한 중학교에서 서울시와 함께 진행중인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친구명찰’ 캠페인. 제일기획 제공

흔히 상품기획 측면에서 보험을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하고, 기획‘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카피라이터가 제품을 팔기 위한 흡인력 있는 짧은 광고문구를 뽑아내고 아트디렉터가 이를 뒷받침하는 그림을 만들어내며 이끌어온 20세기 광고문법의 기획자는 데이비드 오길비와 윌리엄 번바크였다. “시속 60마일로 달릴 때 롤스로이스에서 가장 크게 들리는 소리는 전자시계뿐입니다.”(오길비의 광고카피), “불량품(Lemon)”(번바크의 대표작으로 폴크스바겐 비틀 광고의 한 단어짜리 역설적 헤드라인). 이 둘의 원천 경쟁력은 눈과 귀를 확 잡아끄는 인상적인 카피, 즉 크리에이티브였다. “흉내내는 고양이(copy cat)가 되지 말라”는 광고쟁이들이 신봉해온 경구였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4월30일 찾아간, 서울 이태원에 있는 제일기획의 층계참엔 인상적인 일러스트가 벽면마다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후 2시, 청바지 차림의 한 직원이 헤드폰을 끼고 드러누워 있는 2층 한쪽 널찍한 직원휴게실은 뭔가 창의적인 영감의 산실처럼 느껴졌다. 이날 만난 두 젊은 아트디렉터와 광고기획자는 옷차림이나 행색이 직장인이라기보다 흡사 노래하는 아이돌 같았다. 모두가 “창의적 과학”(오길비), “직관을 통한 예술”(번바크)에 몰두하는 듯했다. 그러나 몇몇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고 사옥을 빠져나올 때쯤 문득 질문이 일었다. ‘크리에이티브는 퇴조하고, 일러스트·청바지·아이돌도 이젠 거대한 빅데이터 물결에 빨려들어가고 있는 걸까?’

굴지의 광고대행사 제일기획빅데이터 기반 통합솔루션으로 변모 아이디어 넘어 ‘제일DnA센터’가 선두SNS 한달 1억, 누적 22억건 수집·분석옥외(4%), TV(34%), 프로모션(21%) 혼합미디어채널 광고집행 최적 황금률 도출등산화 정보탐색 3주, 매장 7.6곳 방문분석 기초해 광고의 매출 극대화 도모‘기획’ 초점은 마케팅 투자대비 수익률‘친구명찰’ 캠페인도 데이터 기반 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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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이후 40여년, 굴지의 제일기획은 지금 전환의 도상에 들어서 있다. 이를 추동하는 힘은 디지털 빅데이터다. 총 임직원 6059명(국내 1380명)이 하는 일부터 달라졌다. 올 1분기 사업영역별 실적(매출총이익) 비중에서 확연하다. 2010년과 견주면 티브이·신문광고 같은 전통 매체 광고(ATL) 비중은 53%에서 29%로 대폭 떨어진 반면, 리테일(소매)·이벤트·전시·프로모션 같은 비매체 광고(BTL)는 28%에서 44%로 커졌다. 디지털부문도 19%에서 27%로 높아졌다. ‘환골’은 아니라도, 광고대행을 넘어 또 ‘아이디어를 파는’ 데서 벗어나 통합솔루션 기획사로 빠른 속도로 탈태·이행하고 있다. 물론 오길비의 크리에이티브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빅데이터 기반의 솔루션 없는 (광고)기획은 “퇴화한 창의와 열정”에 머물 뿐이다. “불량품” 카피는 모험적 문구였다. 이젠 모험이 아니라 과학과 실증으로서의 ‘소비자 (빅)데이터’가 광고캠페인·기획의 요체다. 바야흐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이 데이터가 되는, 소비자 블랙박스가 활짝 열린 시대다. 제일기획이 요즘 표방하는 슬로건은 ‘아이디어로 세상을 움직인다’(Ideas that Move)이자 동시에 ‘빅데이터로 세상을 움직인다’(Big Data That Mov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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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핵심두뇌도 바뀌고 있다. 강렬하고 번뜩이는 광고카피를 뽑아 ‘팡’ 터뜨리는 개인보다는 소비자 행동을 실증분석하는 데이터 분석 ‘조직’이 선두에 서 기획을 이끌어간다. 제일기획의 빅데이터 분석 전문조직인 ‘제일DnA센터’(2013년 설립)는 소셜미디어분석(SMA)과 디지털패널을 통한 소비자행동 분석을 수행하는 곳이다. 총 30명(박사급 5명)이 일하는 센터는 타깃 소비자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경로) 검색·구매하는지 그 여행지도를 24시간, 365일 실시간으로 한눈에 파악한다. “DnA센터는 예전엔 광고대행사 안에 들어올 만한 조직이 아니다. 그러나 이젠 고객인 광고주(클라이언트)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솔루션 기획사로서 데이터 분석이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윤영석 전략팀장)

예컨대, DnA센터가 자체 분석한 크리스마스 케이크의 소셜미디어상 버즈 양 추이를 보면 크리스마스 2주 전에 정점에 이른다. 자연히 비용은 줄이고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는 광고캠페인 집행 최적 시점이 도출된다. 지현탁 DnA센터장은 “영화 <명량>, <국제시장>이 어느 시점에서 티핑포인트(어떤 상품·아이디어가 마치 전염되는 것처럼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번지는 순간)가 나타나는지, 곧 파워콘텐츠가 되는 시점을 버즈 양 빅데이터 수백만건을 분석해 찾아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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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팀에선 뉴스·트위터·블로그·커뮤니티 등 온라인상의 버즈를 한달 1억건가량 수집·분석한다. 지금까지 누적데이터만 22억건에 이른다. 소비자의 욕망 트렌드를 감지하고 시장을 조망·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들이 데이터 속에 다 들어 있다. 또 소셜미디어 채널별로 고객의 구매율·교차판매율·매장방문율을 구한 뒤 구매행동을 유발하는 효과를 측정해보면, 특정 채널의 고객 1명이 특정 기업에 대해 갖는 재무적 기여 가치가 85달러(비고객 대비)로 산출된다. 제품·브랜드·광고모델(2200명)에 대한 소비자 평판·반응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셜미디어의 버즈는 “익명으로 뭉쳐진” 데이터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상호 보완하고, 또 소비자 행동을 횡단면·시계열로 정교하게 분석하기 위해 별도로 디지털패널(15~60살 8200명)을 구축해 조사하고 있다. 패널의 컴퓨터와 모바일에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어떤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뭘 클릭하고 검색하는지 24시간 들여다본다. 한달간 패널의 온라인 동선에서 수집·분석되는 데이터는 6천만건에 이른다. “기존의 제품 서베이는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한 걸까, 하는 의문이 있다. 반면, 검색 행동은 단순 정보탐색을 넘어 실생활과 속마음을 투영하는 행동지표다. 홍삼이나 비타민 검색어는 클릭 자체가 관심도를 보여주고, 여기에 코멘트나 버즈를 한번 더 파악해보면 이 클릭이 구매행동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로가 뚜렷이 나타난다.”(지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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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검색어는 고객의 숨겨진 니즈와 마케팅 인사이트를 던져주는 하나의 ‘발견’이다. 예컨대 티브이 구매 과정을 분석해보면, 구매 15주 전부터 정보탐색이 시작된다. 구매자의 92%가 구매 전 평균 2개 매장을 방문하고, 42.3%가 온라인에서 정보를 탐색한다. 실제 구매는 오프라인 73.1%, 온라인 26.9%다. 초기 정보탐색은 A사 브랜드가 경쟁사(B)보다 2배 높다. 구매 전의 정보탐색 터치포인트(접점)는 네이버검색/지식인, 브랜드 사이트, 뽐뿌 커뮤니티로 분석된다. 이제, 어디에 얼마나 마케팅비용을 투입할지에 대한 솔루션은 이미 나온 셈이다.

DnA센터는 총 27개 채널(브랜드 사이트, SNS카페, 유튜브 등)별로 구매영향력도 규명한다. 분석 결과, 티브이는 접촉률은 가장 높지만 상대적으로 구매영향력은 낮은 반면, 잡지는 접촉률은 낮아도 구매영향력이 높다. 프로모션·매장광고는 접촉률과 구매영향력 모두 매우 높은 반면, 에스엔에스·홈쇼핑은 둘 다 낮다. 이런 분석에 기초해 채널별 광고집행 황금률도 구해낸다. 만약 현재 영화·드라마 속 간접광고 5%, 옥외광고 3%, 티브이 39%, 프로모션 15%의 비율이라면 이제 4%, 8%, 34%, 21%로 혼합구성하는 게 ‘최적’이라는 솔루션이 도출된다. 이 비율로 바꾸면, 채널의 누적접촉량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 구성비 변화에 따른 실제 제품구매율이 16.2%에서 22.9%로 증가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제품 품목별로 효과적인 채널이 무엇인지도 빅데이터가 말해준다.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라도 등산화는 정보탐색 기간이 3주 정도로 단기에 집중되고 온라인 정보탐색은 저조한 반면, 오프라인 매장은 평균 7.6곳을 방문한다. 이와 달리 다운재킷은 정보탐색에 7주가 소요되며, 온라인 탐색이 활발한 반면, 오프라인 매장은 1.5곳을 방문한다. “흐릿한 안경이 아니라, 광고캠페인의 매출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맞춤형 안경이 제공되는 셈”(지 센터장)이다.

의류패션의 경우 자사 브랜드 사이트를 구매자의 43%가 구매 전에 방문하고, 2회 이상 방문 시 구매확률이 12% 증가했다는 데이터에 기반해 집중관리 채널을 설정할 수도 있다. 충성고객과 이탈고객 관리도 해법을 제시한다. 고객이탈 경로를 보니 브랜드 사이트 방문객 중 35%가 경쟁사로 이탈한다면 이런 고객을 대상으로 충성고객관리(CRM) 활동을 전개하는 식이다. “소셜미디어상에선 행동이 거꾸로 제품에 대한 태도·인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과거엔 광고캠페인을 하고 나서 석달 정도 지나 수정·보완했다면 지금은 실시간으로 검색량을 모니터링해 그때그때 바꿔 관리해준다.”(지 센터장) 제일기획은 각 리테일 매장의 마케팅 최적 예산을 뽑아내는 모델도 갖고 있다. 10억원의 예산을 어떻게 배분하면 매출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매장 내 마케팅 활동에 이용되는 판매원, 집기, 세일프로모션, 상품판매대배너광고(POSM)별로 구매기여도를 구하면 최적의 예산 배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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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만난 조갑신 광고기획자는 “우리는 예술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디까지나 모든 ‘기획’의 초점은 소비자의 구매행동, 즉 투자수익률(ROI·마케팅투자 대비 매출)이라는 효율지표에 맞춰져 있다. 검색부터 구매까지 전 과정을 빅데이터 자원에 기반해 읽고 해석한 뒤에 제시하는 솔루션은 소비자 행동을 ‘만들어내는’ 실전 마케팅 액션플랜이다. “광고홍보 수준을 넘어 광고주의 내부 기획단계부터 제일기획이 참여해 디자인하고 유통에도 개입하며, 심지어 시장 판매 가격 설정까지 관여하기도 한다.”(윤 팀장) 클라이언트들이 먼저 광고대행을 넘어 제품 개발·판매에 이르는 밸류체인 전 과정에 대한 통합 솔루션을 제공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자연히 제일기획도 이에 맞춰 변신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제일기획이 최근 내놓은 두 캠페인 ‘아침은 왕처럼’과 ‘친구명찰’도 철저한 데이터에 기반해 구상·실행된 기획이다. 햄버거 체인업체 버거킹과 손잡고 벌인 ‘아침은 왕처럼’은 아침에 지하철 안에서 쪽잠을 자는 사람들이 “○○○역에서 깨워주세요”라고 적힌 안대를 착용하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내릴 역’에 맞춰 깨워준다. 깨워준 사람에게는 안대에 숨겨진 버거킹 커피 쿠폰을 선물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 한국인의 아침 출근·통학길이 매우 피곤하고 힘들다는 팩트를, 또 DnA센터를 통해 한국인의 수면시간이 매우 적다는 데이터도 확인했다. 출근에만 4시간이 걸린다는 어느 자료도 파악했다. 아침은 왕처럼 먹는 게 좋다는 영양학적 분석도 프로젝트의 기초로 삼았다.”(오형균 아트디렉터) 물론 ‘일상 속 작은 즐거움’이라는 버거킹 브랜드 이미지도 살렸다. 이 캠페인 이후 새벽 4시~오전 10시 버거킹 평균매출은 한달 전에 견줘 18.7% 증가했다. DnA센터를 통해 분석해보니 버거킹 브랜드 버즈 양은 같은 기간 44.5%, 브랜드 호감도는 3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부터 서울 은평구의 한 중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학교폭력·왕따 예방 ‘친구명찰’ 캠페인은 명찰에 ‘준서친구 김민재’처럼 친구의 이름을 함께 적어 달고 다니는 프로젝트다. 무선 알림시스템을 명찰에 내장해 학교폭력을 목격했을 때 버튼을 눌러 선생님과 교무실에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이 기획도 1학년 초 서열 형성과정에서 학교폭력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데이터에서 착안했다. “문제를 못으로 보면 답은 망치밖에 없다. 데이터에 기반해 다시 보면 문제는 못이 아닐 수 있다. 왕따를 당할 때 옆에 있던 친구 50% 이상이 ‘외면한 적 있다’고 대답한 어느 실태 조사에서 출발해 서로 친구로 엮어보는 구상을 시작했다.”(조갑신 광고기획자) 지난 6년간 이 학교에서 3~4월에 평균 8.5건 발생했던 학교폭력·왕따는 올해 들어 이날(4월30일)까지 단 한건도 보고되지 않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