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부동산 폭등기에 대거 돈을 빌려 집을 샀던 베이비붐 세대(대체로 1955~1963년생)가 50대가 된 현재도 부채를 거의 줄이지 못해 각 연령대 중 가장 많은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안에 이들의 은퇴가 본격화되면 가계부채 문제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50대 폭탄론’을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들고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책은 없이 지난 8월 부동산 활성화 등의 명분을 앞세워 대출 규제를 푸는 등 오히려 가계부채 관리의 고삐를 풀고 있다.
김지섭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20일 ‘가계부채의 연령별 구성 변화’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50대 가구주가 전 연령대에서 전체 가계부채에서 차지하는 부채 비중이 35%로 가장 높다. 현재 40~50대 가구주가 은퇴할 10~20년 후에는 가계부채 문제가 보다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 가계부채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서브프라임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4년 전인 2004년 미국과, 지난해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를 비교한 뒤, “경제 규모를 고려한 양적 수준은 비슷하게 높은데, 질적인 측면에서는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훨씬 나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견줘 50대 가구주가 안고 있는 부채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2004년 미국 50대 가구주가 갖고 있던 부채가 전체 가계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7%였는데 우리나라 50대 가구주는 35.1%에 이르렀다. 40대 가구주 부채 비중은 32.4%로 미국(31.8%)과 비슷했다. 미국은 대신 30대 부채 비중이 24.6%로 우리나라(14.9%)보다 더 높았다. 미국은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 부채 비중이 높고 50대가 되면 부채가 줄어드는 반면, 우리나라는 40~50대의 비중(67.5%)이 높은 것이다.
연간 소득과 금융부채를 비교한 ‘소득 대비 부채 비율’도 우리나라 50대 가구주는 148%로, 미국(105%)보다 43%포인트 더 높았다. 이 비율이 높을수록 소득에 견줘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의 경우 이 비율은 30대 152%, 40대 135%, 50대 105%, 60대 88%, 70대 49%로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낮아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30대 98%, 40대 134%, 50대 148%, 60대 147%, 70대 160%로 점점 높아진다.
보고서는 “2000년대 중반에 40대였던 베이비부머 세대가 차입한 부채 중 상당 부분이 상환되지 않은 탓에 이들이 50대가 된 2013년에 50대 부채 비중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중반 당시 이들이 받은 주택담보대출은 대부분 일정 기간 이자만 내다 원금을 한꺼번에 갚는 만기일시상환 방식이었는데, 2000년대 후반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로 접어들면서 집을 팔아 빚을 갚을 기회를 놓쳤고, 자녀 사교육비 등 가계지출이 크게 늘어나는 시기인 탓에 빚 규모를 줄이지도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이들이 부채를 줄이지 못하고 은퇴하면 소득이 급감하면서 빚을 갚을 여력이 더 없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고령층은 선진국에 비해 부채 대비 보유자산 비율이 낮고 소득도 급격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정부 대책은 역부족인 상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은 대체로 만기일시상환형 대출을 원리금 분할상환 대출 형태로 전환을 유도하는 게 핵심 뼈대를 이뤘다. 하지만 자녀 교육비 등 생활비가 부쩍 늘어나는 이 세대의 특성상 매월 갚아야 하는 돈이 훨씬 더 커지는 원리금 분할상환 대출로 갈아타기 쉽지 않다. 김지섭 연구위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상황이 심각하지만 정부의 50대 가계부채 대책은 사실상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한 이후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가 과거보다 느슨해지면서 가계부채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앞세운 최경환 경제팀의 정책 방향에 따라 금융당국은 8월1일 총부채상환비율(DTI), 주택담보인정비율(LTV) 등 대출 규제를 완화했고, 그 결과 8월부터 지난달까지 가계부채는 월평균 5조2000억원씩 급증하고 있다. 2011~2013년 3년 동안 가계부채의 월평균 증가액은 1조4000억원 수준이었다. 올해 초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을 잣대로 가계부채를 관리하려 한 금융당국의 정책도 최경환 경제팀 출범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상태다.
지난달 27일 국정감사에서 최 부총리는 “가계부채 총량을 줄이기보다는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고 있다”고 밝혔으나, 실제로 뚜렷한 소득 확대 정책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가계 소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실질임금의 증가율은 지난해 2분기 3.37%에서 올해 2분기 0.17%로 큰 폭으로 떨어졌다. 부채만 늘고 소득은 정체되면서 가계부채가 질과 양, 두 측면에서 모두 악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김용범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은 “가계부채 문제를 지나치게 우려할 단계는 아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미국은 2000년대 상환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에도 대출을 제한 없이 해줬지만, 우리나라는 총부채상환비율이 빨리 도입돼 대출이 상대적으로 엄격하게 이뤄졌다”고 말했다.
세종/김경락 기자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