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반도체 세계 1, 2위인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서로의 특허를 사용하는 포괄적인 ‘크로스 라이센싱’에 합의했다. 그동안 국외의 이른바 ‘특허괴물’들과 소송을 벌여온 두 기업이 국내 업체들끼리라도 소모적인 분쟁을 피하고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3일 두 회사가 반도체 관련 포괄적 특허 공유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두 회사는 “특허분쟁에 따른 불필요한 소모전 대신 신기술 개발을 통한 기술혁신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아이티(IT) 업체 간의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하는 좋은 선례가 되었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두 회사는 서로 간에는 특별히 특허분쟁을 벌인 적은 없으나 각각 해외 특허괴물들과는 여러 건의 소송을 벌여왔다. 하이닉스가 최근 합의에 성공한 램버스 건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램버스와 2010년 9억달러, 하이닉스는 최근 2700억원을 지급하기로 하고 10여년 이상 끌어온 특허분쟁을 마무리한 바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간에 공식 소송을 벌인 적은 없었으나 소소한 분쟁은 계속 있어왔다. 이런 싸움을 피하기 위한 협의가 2~3년 전부터 계속 있어왔고, 최근에야 합의가 됐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번 합의의 가장 큰 의의는 두 회사가 특허소송을 벌일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 확실히 제거된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두 회사가 소송을 벌일 경우 배상금, 소송비용 등 막대한 리스크를 껴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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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전세계 특허분쟁에서 국내 업체들끼리 방어막을 구축했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올해 1분기 전세계 특허분쟁 사건은 2616건으로 지난해 대비 306%나 증가했다. 그중 전기전자·정보통신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9%에 이른다. 특히 지적재산권 강화 분위기에 맞춰 탄생한 특허괴물들의 무차별 소송이 잇따르고 있는데, 특허관리전문회사(NPEs)가 제기한 분쟁은 1분기에만 지난해 대비 554% 늘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특허 크로스라이센스는 분쟁에 대한 방어막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두 회사가 손잡았다는 것은 한국의 반도체 특허방어막이 생겼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하이닉스는 현재 2만1422건의 반도체 관련 특허를 갖고 있고, 삼성전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특허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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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합의가 특허 방어막을 구축했다는 것 외에도 국내 반도체 업계의 경쟁력을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우리가 반도체를 설계할 때 과연 이 기술이 특허에 저촉되는지 선행연구를 하게 된다. 혹시 삼성이 효율성 높은 설계특허를 가지고 있을 경우 이를 피하기 위해 빙 돌아가는 설계를 해야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선행연구를 할 필요도 없고 돌아갈 길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결과적으로 미래 기술개발에만 집중을 할 수 있는 자원이 커지게 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번 합의로 인해 서로의 신뢰가 높아지면 추가로 여러가지 협력 프로젝트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이번 합의에 반색하고 나섰다. 산업부는 이날 “앞으로도 우리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협력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