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철로는 폐선되고 엘리베이터는 비어 있다.
이제 철로는 폐선되고 엘리베이터는 비어 있다.

캐나다 최대 농업협동조합이자 곡물업체였던 휘트풀.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손쉽게 재원을 확보하려 기업을 주식시장에 내놓았다. 17년이 지난 지금 주식은 휴짓조각이 됐다. 조합원 교육을 등한시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협동조합은 다루기 힘든 기업이다. 실패한 협동조합도 적지 않다. 1996년 이후 주식회사의 옷을 갈아입은 캐나다의 서스캐처원 휘트풀(SWP, Saskatchewan Wheat Pool)이 대표적이다. 휘트풀은 캐나다 최대의 농업협동조합이자 곡물업체였다.

1996년 2월 시작된 휘트풀의 기업공개는 12달러의 가격으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처음엔 의결권 없는 주식을 시장에 내놓았다. 이듬해 말에 갑절 이상의 가격으로 잠시 뛰었으나 이후 끝없는 내리막이 이어졌다. 2003년 4월에는 0.2달러의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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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캐처원 협동조합의 산증인인 해럴드 채프먼은 “주식회사로 가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경영진이 설득하자 농민들이 쉽게 넘어갔다. 조합원 스스로 협동조합을 버리고 주식회사를 선택한 충격적 사건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휘트풀 사건은 협동조합에서 교육이 왜 필요한지 되새기게 한다. 1990년대 휘트풀의 조합원들은 협동조합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할아버지 대부터 휘트풀 조합원이었던 서스캐처원의 농부 캐런 티는 “1996년 이후 휘트풀이 주식회사로 바뀐 것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 슬픈 이야기다. 당시 주식회사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경영진의 말을 이사진이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캐런은 “여러 단계를 거쳐 대의원을 뽑고 이사진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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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벌 수 있다는 경영진 말에농민들은 쉽게 넘어갔다그 과정에 민주주의는 없었다기업공개 후 실책 이어지면서투자자와 조합원은 속속 이탈했다정체성·경영 위기 겪고 있는농협중앙회의 반면교사다

휘트풀은 정체성 위기와 경영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우리 농협중앙회의 반면교사이다. 농협에서 조합원들에 대한 협동조합 교육이 사라진 지 오래다. 협동조합의 근간인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 주인인 조합원은 협동조합을 알지 못하고, 대리인인 농협 회장과 정부 관리들이 경영을 주무른다. 협동조합도 주식회사도 아닌 조직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불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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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캐처원 대학의 머리 풀턴과 캐시 라슨 교수는 <협동조합 딜레마>(A Cooperative Dilemma)에 실은 보고서에서 “휘트풀은 협동조합으로서도, 주식회사로서도 실패했다”고 질타했다.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고, 기업공개 이후 성급하고 부실한 투자가 이어졌고, 최고경영자가 독선적인 의사결정으로 실책을 남발했으며, 경영진이 정보를 독점하고 이사회는 무능하게 따라가는 대리인의 문제가 발생했고, 결국 조합원과 투자자 어느 쪽의 이해도 반영하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성급한 기업공개와 연쇄 부실 투자

휘트풀의 핵심 자산인 소규모 목재 엘리베이터(곡물창고)가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대규모 콘크리트 엘리베이터에 대한 투자가 불가피해졌다. 협동조합인 휘트풀은 대규모 자본조달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사회와 경영진은 10년 이상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미루었다. 그사이 순이익이 1억5000만달러에서 90년대 중반 5000만달러대로 떨어졌다. 은퇴하는 노령 조합원들의 출자지분을 현금상환해 주는 데 추가로 1억달러 이상의 재원이 필요했다.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1995년에 대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무의결권주 상장 결정이 이뤄졌다. 1993년에 새로 취임한 돈 로언 최고경영자는 거칠게 탈협동조합을 밀어붙였고, 무차별적인 대규모 해외투자를 감행했다. 하지만 연이은 투자 실패로 장기부채가 1996년 9300만달러에서 1999년 5억1800만달러로 다섯배나 늘어났고, 만년 흑자기업이던 휘트풀이 1999년 처음으로 1400만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순손실 폭은 이듬해 9700만달러로 수직상승했다.

대규모 콘크리트 엘리베이터들이 목재 엘리베이터를 대체했다.
대규모 콘크리트 엘리베이터들이 목재 엘리베이터를 대체했다.
견제받지 않은 최고경영자의 독선

최고경영자는 공세적으로 성급한 투자유치를 밀어붙이면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 문화를 바꾸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무능한 이사회는 두 손을 놓고 있었다. 농민 조합원 중에서 뽑힌 이사들 중에는 법률, 마케팅, 재무 분야의 전문가가 없었다. 글로벌 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작은 농장을 경영하던 이사진의 역량으로 경영을 감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경영진이 내놓는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정보의 비대칭이 심화됐다. 이사회 의장과 부의장을 상근제로 바꾼 것도, 이사회의 독립성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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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과 투자자, 양쪽 모두 실패”

휘트풀의 기업공개는 조합원과 투자자 어느 쪽의 이해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주가와 수익성이 곤두박질치니,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시장점유율의 급속한 하락은 조합원의 이탈을 불렀다. 서스캐처원 곡물시장에서 휘트풀의 점유율은 80년대 내내 60% 이상이었으나, 90년 이후 불과 5년 사이에 35%로 떨어졌다. 조합원의 지분율도 기업공개 직후 54%였으나, 3년 뒤인 1999년에 30%로 떨어졌다. 조합원을 지켜주지 못하는 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이 이탈했으며, 일부는 직접 곡물창고 운영사업에 뛰어들어 휘트풀의 경쟁자로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머리 풀턴과 캐시 라슨은 보고서 결론에서 “협동조합은 복잡한 조직이다.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조직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해서 성급하게 변화를 추진해서는 안 된다. 기존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고장난 상황일수록 더더욱 그렇다”고 지적했다.

글·사진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농협중앙회. 사진 한겨레
농협중앙회. 사진 한겨레
>>> 농협중앙회는 지금대리인이 주인 노릇하는 구조협동조합 가치 회복이 급선무

농협중앙회의 지금 모습은 캐나다의 서스캐처원 휘트풀과 닮은꼴이다. 정체성 위기와 경영 위기를 한꺼번에 겪고 있다.

지난해 봄의 사업구조개편 이후 정체성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직원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한다. 조합원의 민주주의는 고장난 채 방치됐고, 무능한 경영진과 관치의 합작이 농협을 지배한다. 경영 사정도 나빠졌다. 1분기 농협금융의 당기순이익은 5대 금융지주 중 가장 적은 1550억원에 머물렀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에스티엑스그룹의 여신 규모는 가장 많아 2조원을 훌쩍 넘어선다.

신동규 금융지주 회장의 사임 사태가 벌어지자 농협중앙회 쪽은 협동조합의 기본원칙도 모른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오십보백보이다. 최원병 회장의 농협중앙회는 진정한 협동조합과 거리가 멀다. 농협의 지배구조는 조합원→대의원→지역조합장→대의원조합장→농협중앙회장→농협금융지주→농협은행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조합원의 이해가 일선 경영에 반영되기 지극히 어렵고, 대리인이 주인 노릇을 하기에 딱 좋은 구조이다. 협동조합은 조직이 커질수록 조합원 교육이 더 중요해진다. 그게 없으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의 교육 무관심은 심각한 직무유기이다. 농협은 협동조합 간의 협동이라는 대원칙조차 외면한다. 협동조합기본법 이후 새로 생겨난 작은 협동조합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는커녕 기득권을 뺏길까 우려하는 반협동조합적인 행태를 보인다. 협동조합 맏형의 본분에 어울리지 않는다.

농협중앙회에서 떨어져나간 금융지주와 자회사들이 주식회사의 경쟁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농협중앙회가 100% 대주주임을 내세워 인사와 예산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있다. 홍보조직은 몇달 만에 다시 중앙회로 통합해 버렸다. 앞으로 태어날 경제지주의 운명도 지극히 불투명하다.

농협 재개혁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의 어정쩡한 지배구조로는 협동조합과 주식회사 양쪽에서 실패한 휘트풀의 전철을 밟기 십상이다. 출발점은 협동조합 가치의 회복이고, 진정한 협동조합 리더십의 재창출이다.

김현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