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회피처를 이용한 역외탈세를 차단하려는 논의가 한창이다. 불법적이고 부당한 수단으로 축적한 재산이나 소득을 조세회피처로 숨기는 것은 조세정의를 위협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다. 철저한 추적과 근절 대책이 필요하다.

국내 중견 금융투자회사의 대주주인 김아무개씨는 2000년대 초반 홍콩의 한 금융중개회사를 통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회사 자산을 이 페이퍼컴퍼니로 옮기도록 해 3~4년 동안 국내외 금융상품 투자로 수백억원의 평가차익을 얻었다. 그러나 회사에는 원금만 보내도록 하고, 투자이익은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홍콩 소재 외국계은행에 계설한 여러개 계좌로 모두 빼돌렸다.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역외탈세 가운데 비교적 간단한 유형이다. 그럼에도 국내 과세당국이나 금융당국은 이런 우회투자 내역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탈세·불법 비자금·국부 유출…미로처럼 꼬인 탓에 적발 어려워자진신고 유도 등 제도개선 시급국제공조 통한 강력한 대응 필요5년간 537건 적발·고발 등 처분 45건솜방망이식 처벌 더이상 안돼

단순한 금융거래가 아니라 국외 현지법인과의 무역거래나 직접투자, 과실송금 등을 위장하면서 조세회피처를 경유할 경우에는 더욱 복잡해진다. 얽히고설킨 고리를 다 풀어야 탈루세금을 밝힐 수 있다. 조세정의네트워크(TJN)의 이유영 동아시아지역 대표는 “전세계적으로 역외탈세의 대부분은 다국적 기업활동 차원으로 이뤄지는 이전가격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이전가격에 대한 국가간 표준기준을 마련하지 못하면 역외탈세 추적은 영원한 숙제로 남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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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가격이란, 다국적 기업이 세 부담을 피하려고 세금이 적은 나라로 이익을 집중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조세회피처는 세금 혜택에 더해 철저한 금융비밀주의로 ‘검은돈’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이전가격을 쉽게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조세회피처는 단지 탈세 뿐 아니라 기업자금 횡령, 불법 비자금 조성, 국부유출 등 ‘공공의 적들’의 온상이다.

관세청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박원석 의원(진보정의당)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무역거래를 가장한 불법외환거래 적발 금액 가운데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경우의 비중이 2011년 78.4%, 지난해에는 82.6%나 된다. 비영리 탐사보도매체 <뉴스타파>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조사해 발표한 조세회피처의 한국인 명단에서도, 조세회피처는 합법을 가장한 온갖 탈·불법 의혹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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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고제도 개선부터 시급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와 진보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역외탈세, 빈 구멍을 막아라’라는 제목으로 긴급토론회를 열어 조세회피처 악용을 막기 위한 다양한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발제를 맡은 조수진 변호사(조세재정개혁센터 실행위원)는 조세회피처 문제 해결의 첫째 열쇠로 기업이나 개인의 자진신고 활성화를 꼽았다. 조 변호사는 “외국에서 벌어진 일의 경우 과세당국의 정보가 부족하므로 납세자의 자발적 신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진신고자에게는 여러가지 혜택을 주고, 미신고 또는 축소신고에 대해서는 국내 탈세범에 준하는 무거운 처벌 조항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국제조세조정법률 개정안에 따라 2011년부터 국외 금융계좌에 대한 신고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신고율은 여전히 저조하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가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해외금융계좌 신고현황’을 보면, 지난해 개인 신고 대상자 1400명 가운데 신고자는 302명으로 신고율이 고작 21.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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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진 변호사는 “어떤 당근을 제시해도 아예 신고하지 않을 부류의 탈세 행위에 대해선 세금 추징 때 국세청의 입증 책임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세청은 아예 미신고 국외 금융계좌의 자금출처에 대한 납세자 입증 책임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우리나라처럼 소득세 열거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나 독일 등도 미소명 국외 금융계좌의 자금을 과세소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취지로 입법을 시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국제공조에 적극 참여해야 신고제도를 강화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과세당국이 국외에 옮겨둔 자산이나 소득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과세대상 소득을 조세회피처의 페이퍼컴퍼니에 담궈 세탁해버리면 추적경로가 끊긴다. 따라서 조세회피처 과세당국의 정보 협조가 필요하다. 정부는 조세회피처로 분류되는 국가 또는 지역과의 조세정보교환협정 체결에 적극 나서고 있으나 아직 지지부진하다. 협정이 발효되더라도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박원석 의원은 “정부가 바하마, 바누아투공화국과의 조세정보교환협정 비준 동의안을 최근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 두 나라는 한국인의 투자가 거의 없거나 극히 미미하다. 반면 조세도피처 중 투자잔액 상위 국가인 버뮤다는 지난해 1월 협정 서명을 마쳤으나 아직 발효 절차가 완료되지 않았고, 케이먼제도와도 2010년 3월 가서명한 상태에서 진전이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조세회피처와의 협정 체결보다는 다자간 논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한다. 세계 금융위기 뒤 조세회피처는 국제적 지탄의 대상이다. 탈세와 검은돈 거래를 조장해 금융위기와 각국 재정위기를 야기한 주범으로 꼽힌 까닭이다. 16~17일 북아일랜드에서 열린 주요8국(G8) 정상회담에서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국제탈세가 핵심의제로 다뤄지는 등 주요국들은 조세회피처 및 금융비밀주의에 대한 압박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번 회담에선 미국이 2010년 제정한 ‘국외금융계좌과세법(FATCA)’을 국제기준으로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금융기관들도 비상이 걸렸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금융기관들은 내년부터 이 법에 적용을 받아 일정 금액 이상의 국제 금융거래에 대해선 미연방 국세청에 통보해야 한다. 조세회피처와의 거래는 당연히 통보대상에 포함된다. 이유영 대표는 “금융비밀거래를 차단하려는 국제적 움직임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우리 정부도 이런 다자간 국제협약에 적극 참여하고 이에 맞춰 국내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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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만 있으면 길은 보인다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역외탈세를 근절하는 과제는 특정 부서만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관련 조직간 정보공유나 공조 체계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고, 단속과 처벌에도 미온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김유찬 홍익대 교수(경영학)는 “현행 법과 제도 하에서도 과세당국이 적극적인 의지만 있으면 조세회피처 이용을 억제할 수 있다. 가령 1995년 제정된 국제조세조정법에는 조세회피처에 법인 등록을 한 기업이나 개인은 현지 유보소득이 있을 경우 배당이익이 발생한 것으로 간주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활용된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원석 의원도 “국세청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적발한 역외탈세 건수가 537건인데 검찰에 고발하거나 통고처분한 건수는 45건으로 8%에 불과하다. 역외탈세의 심각성과 고의성에 비추어 너무 미온적 대응이다”라고 비판했다.

조세회피처에 대한 당국의 과도한 규제를 경계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기업의 대외 투자 및 영업활동을 위축시키고, 정당한 절세 행위까지 불법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기업 쪽의 조세회피처 옹호론에 대해 이유영 대표는 이렇게 반박한다.“지금까지 뉴스타파가 공개하거나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국내 기업인들의 조세회피처 이용 사례를 보면 선진국 유명기업들의 행태와는 뚜렷하게 차이나는 점이 있다. 기업이 아니라 기업 사주와 가족, 고위경영자들의 사적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조세회피처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이익까지 침해하고 건전한 경제질서를 해치는 중대 범죄다.”

박순빈 선임기자 sb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