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삼성그룹은 27일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 비자금’ 특별검사법을 수용한 데 대해 별다른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삼성그룹 고위 임원은 공식 반응 요청에 “‘특검이든 검찰이든 성실히 수사에 응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답변으로 대신해 달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등 그룹 수뇌부에 대해 출국금지 조처가 전격적으로 취해지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삼성은 검찰이 초기부터 그룹의 ‘몸통’을 정면으로 겨냥한 게 아니냐며 검찰 수사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희 회장의 출국이 금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회장은 통상 연말엔 일본 등 국외에 머물며 사업 구상을 했는데, 최근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국내에 머문 때가 많았다.
삼성그룹 직원들은 “검찰 수사가 외국에 보도되면 그룹의 신인도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며 “그동안 올림픽 후원 등으로 어렵게 쌓아온 일류 그룹의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검찰과 특검 수사가 잇따라 이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검찰에 특검까지 합치면 최소한 내년 1분기까지는 핵심 경영진들이 피의자나 참고인 신분으로 수사를 받게 된다”며 “경영 사이클이 상당 부분 영향을 받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또 “대통령이 특검법을 수용하면서 자칫 검찰이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고 무리하게 수사를 밀어붙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자 삼성그룹은 애초 다음달 5일로 계획했던 이건희 회장 취임 20돌 기념 행사의 취소를 검토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갖가지 의혹이 제기돼 국민으로부터 큰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축하 행사를 할 수 있겠느냐”며 “행사를 취소할 것인지 여부를 조만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그룹은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에 대비해 꽤 오래 전부터 준비를 면밀히 해 온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지금까지 제기된 비리 의혹과 관련 있는 계열사나 부서별로 보안 점검을 부쩍 강화했고, 주요 계열사에 보존 기한이 지난 문서를 폐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해봐야 건질 게 있겠느냐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회장 등 그룹 수뇌부의 소환조사에 즈음한 대응책도 마련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고위 임원은 “사내 변호사는 대리인 자격이 없기 때문에 로펌 등을 통해 대비하고 있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과의 오랜 거래처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와의 유착 의혹을 제기함에 따라 대리인 선정 문제도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삼성은 다만 검찰 수사가 당장 이 회장의 소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다고 보고 있다. 김 변호사가 공개한 차명계좌 등으로부터 그룹 수뇌부까지 ‘연결 고리’를 찾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란 얘기다. 또 그룹 수뇌부 사이에서는 검찰 수사를 통해 순수한 증거 다툼과 법리 공방을 벌일 경우 ‘지금보다 불리하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룹 고위 임원은 “지금까지는 일방적인 의혹이 무차별적으로 확산됐지만 하나 하나 따지고 적극적으로 소명하면 삼성에 대한 오해가 상당 부분 풀릴 것”이라며 “검찰 수사도 확실한 증거 없이 사람을 불러 창피나 주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