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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금융실명제, 막강 재벌 앞에선 ‘허수아비’

등록 :2007-10-30 21:57수정 :2007-10-31 11:21

삼성, 은행원 사무실 불러 비밀계좌 트고
은행선 막강 재벌고객 위법 행위 눈감고
차명거래자 처벌조항 없어 법률적 한계
김용철 변호사가 29일 공개한 ‘삼성그룹 차명계좌 운용 실태’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제법)이 재벌 앞에서 무력화될 수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금융실명제법은 모든 금융거래는 본인 이름으로 하라는 취지에서 제정됐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보면 계좌 개설부터 거래, 폐쇄에 이르기까지 금융실명제법이 철저히 무시됐다. 금융회사의 자체 감사나 감독당국의 검사도 무용지물이었다.

먼저 삼성의 계좌 개설부터 명백한 불법이다. 일반 계좌의 경우 명의 신탁자의 인감증명서와 주민등록증 사본, 위임장 등이 있으면 대리인의 계좌 개설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보안 계좌’는 개설은 물론 거래도 계좌 명의자가 직접 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도 김 변호사는 삼성그룹에서 퇴직하기 전까지는 계좌의 존재 자체를 몰랐을 뿐 아니라, 퇴직 후 계좌 존재를 알고 난 뒤에는 거래 내역을 조회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은행과 굿모닝신한증권도 차명 거래를 용인한 만큼 법을 위반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정확한 사실 관계는 조사해 봐야 안다”고 전제한 뒤, “제기된 의혹이 사실일 경우 금융실명제법 위반 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검사실은 조만간 의혹이 제기된 삼성센터지점을 상대로 자체 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또 김 변호사의 증언을 보면,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이 은행 직원을 그룹의 특정 사무실로 불러 계좌를 개설한데다 계좌 명의자인 김 변호사에게 아무런 언급 없이 수차례 해당 계좌를 통해 금전거래를 했다. 금융계의 한 인사는 “우리은행이 주요 법인 고객인 삼성의 위법적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이러한 힘의 우위를 이용해 삼성그룹이 차명 거래를 태연히 한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삼성그룹이 그동안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김명진 기자 <A href="mailto:littleprince@hani.co.kr">littleprince@hani.co.kr</A>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삼성그룹이 그동안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런 차명계좌 운용에 금융감독당국은 속수무책이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특정 사건이나 혐의가 있을 때는 개별 계좌 내역에 대해 자료를 요구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검사에선 차명 거래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금감원의 또다른 관계자는 “실명법 위반과 같은 의혹이 불거지면, 해당 은행에 대한 검사를 실시한다”고 말했다. 사건이 터져야 실체 규명에 나선다는 얘기다.

금융실명제법의 한계도 지적된다. 윤종훈 회계사는 “대법원 판례는 금융거래에 있어 명의신탁 약정의 효력을 강하게 인정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불법 자금 거래나 조세 회피 등의 수단으로 차명 거래가 만연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이 차명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비자금 자체의 소유권은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최영태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회계사)은 “차명 거래자에 대해 직접적인 처벌 조항이 없는 것도 차명 거래가 쉽게 근절되지 않는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삼성그룹이 차명계좌를 개설하고 거래하는 과정에서 김 변호사의 인감증명서나 주민등록증 사본 등을 임의로 이용했다면 사문서 위조 등에 따른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법 위반에 따른 처벌은 받지 않는다.

심상정 의원(민주노동당)은 “지금의 금융실명제가 타인 명의의 금융거래를 직접 금지하고 있지 않은 탓에 비자금 문제가 계속 나오고 있다”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내놨으나,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될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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