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황 부진으로 석유화학 사업 재편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한 공장 모습.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업황 부진으로 석유화학 사업 재편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한 공장 모습.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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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최근 국외에 있던 달러 자금 상당액을 국내로 들여왔다. 환율 방어에 나선 정부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수조원에 이르는 이 돈(달러 환류 자금)을 시중은행에 맡기려 하자, 은행 쪽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부동산 시장의 거래 절벽으로 대출처를 찾기 어려워진 은행으로서는 대규모 단기 예금이 운용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현금 125조원을 보유한 기업이 12년 만에 채권시장으로 눈을 돌린 이유다. 지난 3월26일 열린 국민성장펀드 간담회에서는 “스케일업 투자 부족으로 유망 기업이 경쟁력을 잃거나 국외 자본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은행이 대출처를 찾지 못하는 사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은행의 지난 24년간(2001~2024) 공시 데이터를 보면, 주택자금대출 비중이 8.1%에서 58.8%로 올랐다. 기업대출 가운데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부터 부동산업·건설업에 역전당했다. 케이비(KB)국민은행에서도 2017년부터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은행 자금이 부동산에 갇히는 동안, 지역의 기술 스타트업은 시제품 제작비 수억 원을 구하지 못해 문을 닫고 있다.

왜 민간 금융은 지역의 혁신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혁신 기업 창업과 중소·중견 기업의 스케일업이 중요한지부터 짚어 봐야 한다. 2024년 일자리행정통계에 따르면, 대기업 일자리는 443만개로 전년보다 8만개 줄었다. 전년(-4만 개)에 이어 감소 폭도 확대됐다. 중소기업 일자리 역시 1644만개로 1만개 줄어,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감소세로 전환했다. 제조업은 생산과 수출이 늘었는데 고용은 부진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대기업은 생산직을 늘리지 않고, 사무직 신입 채용도 줄이고 있다. 이런 추세는 비수도권에서 더욱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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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는 줄고 있지만, 인력 부족 문제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산업·기업·지역 간 수요 불일치에 따른 현상이다. 2023년 기준 제조업 인력부족 인원은 13만5천명으로, 산업 중 가장 많다. 300인 미만 사업체의 인력 부족률(3.3%)은 300인 이상 사업체(1.6%)의 두 배다. 대기업에서는 일자리가 줄어드는 반면, 지역의 중소·중견기업에서는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제조업에서는 다르다. 규모가 작은 기업은 규모의 경제가 되지 않아, 충분한 설비 투자와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이 어렵다. 마케팅과 연구개발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수많은 대졸자가 이런 소규모 기업을 꺼리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이들 기업 입장에서도 계절노동자, 유학생, 고용허가제 노동자로 구성된 외국 인력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혁신 역량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달리 말해 지역에 뿌리내린 강소 중소·중견기업이 성장하거나, 제조 스타트업이 창업하지 않고서는 양질의 다양한 일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산업 구조 전환이 현실에서 구현되기는 쉽지 않다. 일단 규제 문제가 크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전환하면 94개의 규제가 새로 적용되고, 대기업이 되면 이런 규제가 329개로 늘어난다. 중견기업 전환 유예 제도를 활용하는 기업이 2020년 949개에서 2024년 1377개로 확대된 것은 이런 규제 부담을 회피하려는 유인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중견기업 전환 유예 제도는 중소기업이 일정 기준을 넘어 중견기업이 되더라도, 유예 기간을 둬 기존 중소기업 지원과 규제 특례를 계속 적용해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완화해 주는 제도다. 반면, 같은 기간 중소기업으로 회귀한 중견기업이 427개였고, 대기업으로 성장한 중견기업은 103개에 불과했다. 1990년 이후 중소기업에서 출발해 대기업으로 성장한 제조기업은 셀트리온과 에코프로 두 곳뿐이다. 규모를 키워 규제를 받느니 이자만 갚으면서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는 편이 합리적 선택이 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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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는 스타트업과 중소·중견기업 관점에서 진로도 퇴로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일단 진로가 없다. 투자 자본이 지역에 자생적으로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벤처투자의 73%가 수도권에 집중되고 등록 벤처캐피탈(VC)의 87%가 수도권에 위치하는 것은 시장 논리가 만든 결과다. 벤처캐피탈은 투자 대상 기업을 한두 번 방문하는 것만으로 투자를 결정하지 않는다. 반복적인 접촉과 모니터링을 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지리적 거리에 비례한다. 투자 대상, 공동 투자자, 회수 시장이 모두 수도권에 있는 상황에서, 민간에 맡겨두면 벤처캐피탈이 지역으로 갈 유인은 없다. 한국산업은행이 동남권투자금융센터를 설립하고 부산미래성장벤처펀드 2600억원을 조성한 것, 아이비케이(IBK)기업은행이 부산·울산·대전·광주에 창업 플랫폼을 운영하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아직 민간 벤처캐피탈과의 매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역 안에서 투자→성장→회수→재투자의 순환을 완결시킨 경험은 전무하다.

퇴로도 없다. 삼일피더블유시(PwC)에 따르면, 중견·중소기업 오너가 기업 매각 때 가장 선호하는 거래 상대는 사모펀드(PE·48%)다. 은행이나 전략적 인수자가 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기업 구조조정 상황에서 금융위원회, 산업은행, 채권단이 모두 달라붙어 인수처를 찾는 것과 달리, 사업을 정리하려는 중소·중견기업은 기술 역량이나 생산역량에 대한 충분한 평가 없이 그저 자산가치만 고려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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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기술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지 못하는 것은 담보 없이 사업성으로 심사하는 리스크 중개 역량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원 조사를 보면, 2014년 도입된 기술신용평가(TCB) 제도의 지난 10년간 실적의 68.8%가 기존 대출의 단순 전환이었고, 심사역 1인당 하루 처리 건수는 8건을 넘었다. 기술력을 제대로 검증하기보다는 사실상 형식적인 심사만 반복된 셈이다.

소기업·창업 관련 연구를 다루는 국제학술지 ‘스몰 비즈니스 이코노믹스’에 2023년 실린 연구는 소프트웨어·연구개발(R&D)·데이터베이스 등 식별 가능한 무형자산이 외부 자금 조달 능력을 유의미하게 높인다는 결과를 보고하며, 무형자산이 담보로 부적합하다는 통념에 도전했다. 스타트업을 위한 금융솔루션을 제공하는 핀테크 기업 고위드(GoWid)가 실시간 현금흐름 기반으로 연대보증 없이 누적 1.3조 원의 신용을 공급한 것은 이 가능성의 국내 실증이다.

다만, 지역으로 가면 이런 핀테크의 첨단도 경험하기 어렵다.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금 사다리를 넘어 자력으로 매출을 일으키기 시작한 스타트업에 필요한 것은 운전자금이다. 그 단계에서 만나는 것이 은행인데, 지역 은행은 기술 기업을 심사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유인의 문제에 경험의 부재가 겹치는 것이다. 은행이 움직이지 않는 유인구조는 분명하다.

국민성장펀드나 지역투자공사 같은 공적 기금이 지역의 딥테크·소부장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최근 충청권 투자공사를 제안한 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물론, 같은 당 박주민 의원은 서울 지역투자공사까지 제안했다. 그러나 정책적 선택들은 여전히 공백이다. 이런 공적 기금들이 단순한 자금 공급이 아니라 유인 문제와 경험 문제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민간 벤처캐피탈·액셀러레이터와의 공동심사를 설계 단계부터 의무화하면 심사 역량이 이식되고, 권역 내 인수·합병(M&A) 매칭과 세컨더리 거래를 중개하면 회수 자금이 지역 안에서 돌기 시작한다. 핵심성과지표(KPI)를 개별 건 생존율이 아닌 펀드 수익률로 설계하면, 심사역들과 기관의 의사결정자가 감사 리스크를 피해 안전한 곳에만 투자하는 관성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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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지역의 투자금융 기관이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기업) 하나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발굴에서 투자, 성장 지원, 상장까지 전주기를 완주하고, 그 기업이 지역에 착근해서 지역의 인재를 고용하는 선순환이 한 번이라도 실현돼야 한다.

지역 중심의 혁신 생태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이중과업을 완수해야 한다. 첫째는 자본시장의 과업이다. 은행이 부동산이 아니라 혁신 기업에 자금을 배분할 때 이익이 되도록 위험가중자산 규제를 현실화해야 한다. 기술신용평가로 무형자산을 식별하고 가치를 매길 수 있는 평가 역량이 은행 안에 축적되어야 한다. 지역재투자평가제도의 지방정부 금고 선정 시 반영을 의무화하고, 벤처펀드 출자에 대한 위험가중치(RWA) 부담을 낮추는 것은 그 출발점이다. 민간 자본이 지역으로 흐를 수 있는 물길을 규제 체계 안에 내야 한다.

둘째는 공공금융의 과업이다. 국민성장펀드와 지역투자공사는 자금의 공급자가 아니라 생태계의 설계자가 돼야 한다. 민간 벤처캐피탈·액셀러레이터와의 공동심사로 심사 역량을 이식하고, 권역 내 인수·합병 매칭과 세컨더리 거래를 중개해 회수 자금이 지역 안에서 재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의 스타트업을 발굴해서 투자하고, 성장을 지원하고, 상장까지 완주하는 전주기를 한 번이라도 경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그 유니콘 기업 하나가 지역에 뿌리를 내려 지역 인재를 고용할 때, 비로소 제도를 넘어 스스로 진화하는 지역 혁신 생태계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