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정을 통한 협치
독일 현지에서 만난 학자·정치인·언론인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극우세력이 독일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걱정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인다. 그 바탕에는 독일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강한 신뢰가 깔려 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에 성공한 모범국으로 꼽힌다. 이런 성공의 비결로는 의원내각제에 기반한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시장과 정부 역할의 조화를 추구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두 축이 꼽힌다.
전후 74년간 독일 총리를 역임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올라프 숄츠 현 총리를 제외한 나머지 8명의 평균 재임기간은 9년에 이른다. 같은 기간 일본의 총리가 모두 50명으로, 평균 재임기간이 1년6개월에 못 미치는 것과 대비된다. 독일의 정치 안정은 여러 정치세력이 연정을 통해 협치를 이뤘기 때문이다. 영국 언론인 존 캠프너는 저서 ‘독일은 왜 잘하는가’에서 이를 “자유 민주주의가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격찬했다.
주요 정당 중 어느 한곳도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기 힘든 정치구조에서 연정은 필연적이다. 중도우파 기민련과 중도좌파인 사민당의 대연정도 네차례나 있었다. 다양한 정치세력 간의 연정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대화, 타협의 정치문화를 탄생시켰다. 연정을 하려면 두꺼운 연정합의서를 먼저 작성해야 한다. 연정 파트너와의 약속 이행은 자연스럽게 신뢰 정치의 토양이 됐다. 한국정치를 전공한 하네스 모슬러 독일 뒤스부르크 에센대 교수는 “연정합의서 작성은 국민이 지루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합의 내용이 지켜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안정의 초석 사회적 시장경제
■ 정치안정이 경제발전을 부른다
독일은 연정과 협치를 통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과 조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독일 통일도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의견이 많다. 박종구 초당대 총장은 “독일은 정치가 잘돼야 경제도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강조한다. 연정이 일상화된 독일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정부 정책이 갑자기 바뀔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작다. 정치학자인 카를루돌프 코르테 뒤스부르크 에센대 교수는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권력이 공정하게 교체되는 안정적인 정치 시스템은 기업가와 투자자에게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에너지 분야는 독일의 정책 일관성을 잘 보여준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위기 속에서도 지난 4월 마지막 남은 원자력발전소 3기를 폐쇄했고, 재생에너지 확대와 러시아 천연가스 대안 찾기에 집중하고 있다. 독일의 민간 에너지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의 지몬 뮐러는 “가스 가격 급등을 포함한 화석에너지 위기는 보다 빠른 재생에너지 확대와 건물 및 산업부문의 전기화가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면서 “이런 위기 상황에서 원전과 관련한 옵션(탈원전 정책 변화)은 고려되지 않고 있는데,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원전 3기의 전력 생산량이 매우 적었을 뿐만 아니라 신규 (원전 건설) 프로젝트는 매우 큰 비용과 상당한 건설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독일에서는 원자력과 석탄화력발전을 풍력·태양광·수력발전과 같은 청정전력 생산과 재생가능한 수소로 전환하겠다는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고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소의 염광희 박사는 “재생에너지는 미래에 발생할 에너지 위기로부터 독일 시민 및 산업을 지켜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존경받는 독일 정치인
■ 방어적 민주주의
[%%IMAGE4%%]
독일 극우세력의 부상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위기로 인한 경제난과 생활고 등 경제적 요인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마르틴 고르홀트 전 차관은 “2015년 시리아 난민 유입, 2020년 코로나 위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위기를 거치며 경제적 어려움이 커진 게 극우세력 확산의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난민 반대도 결국 경제적 불만이 작용한다.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왜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냐는 것이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난민을 합치면 400만명으로, 독일 국민의 5%에 이른다. 옛 동독 지역이 극우세력의 본거지가 된 배경에도 동·서독 통일 이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지역 간 경제적 격차가 놓여 있다.
독일대안당은 외국인 혐오와 반이슬람 정서를 표출한다. 난민 수용과 과거 역사 반성에 반대하고, 유로 탈퇴를 주장하는 등 독일이 그동안 지켜온 가치와 성과를 부정한다. 이런 행보는 합헌과 위헌의 경계선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토마스 할덴방 독일 헌법보호청장은 지난 8월 독일대안당의 극우적 행태에 대해 공개 경고했다. 독일 정보기관인 헌법보호청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극단주의 세력을 감시하고 독일공화국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독일의 기존 정당들은 좌우 구분 없이 헌법 질서를 위협하는 극우정당은 연정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배경에는 독일 헌법인 기본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규정이 있다. 기본법 제20조 제4항에 따라 모든 독일인은 (헌법) 질서의 폐지를 기도하는 자에 대하여 다른 구제수단이 불가능할 때는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위헌 정당과 결사를 금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많은 독일 국민이 극우세력의 권력 장악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의 정론지 중 하나인 ‘디 차이트’가 2017년부터 시작한 ‘독일이 말한다’ 프로젝트는 독일 사회의 희망과 저력을 보여준다. 디 차이트는 연방 선거를 앞두고 극우정당이 급부상하고 사회 분열이 극심해지자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 일대일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기획했다. ‘독일이 말한다’는 2018년 ‘유럽이 말한다’, 2023년 ‘세계가 말한다’로 확장됐다. 지금까지 누적 기준 120여개국 29만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디 차이트의 온라인 부편집장인 제바스티안 호른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만남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형성할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 한국의 해법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