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이 먹던 정크 푸드인데, 한국에서는 명절 선물로까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뉴욕타임스> 국제판이 2014년 1월 보도한 내용이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스팸’이다. 외국 언론이 보기엔 기이한 명절 풍습이지만, 한국인들에게 명절 때 스팸을 주고받는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히려 “명절 선물로 스팸만 한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떻게 서구의 정크 푸드는 한국의 명절 선물로 자리 잡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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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판매 ‘쑥쑥’

2일 스팸의 국내 제조권을 가진 씨제이(CJ)제일제당 자료를 보면, 지난해 스팸 국내 매출은 3580억원에 달했고, 올해는 4천억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한다. ‘깡통 햄’ 하나 매출이 웬만한 중견기업 매출보다 큰 꼴이다. 이 가운데 명절 선물세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선다. 지난해 기준 스팸 선물세트의 매출은 2130억원이다. 전체 매출의 59.5%에 이른다. 선물세트의 대부분이 명절에 팔리는 것을 감안하면, 명절 판매 비중이 60%에 육박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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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제이제일제당은 이번 추석을 앞두고 지난해 대비 스팸 생산 물량을 30% 가량 높이기로 했다. “최대 매출 기록을 달성할 것 같다”고 회사 관계자는 말했다.

유통 채널 쪽 자료를 봐도 상황은 같다. 홈플러스 자료를 보면, 지난해 추석 때 사전 예약을 가장 많이 받은 상위 10개 제품 가운데 4개가 스팸 관련 제품이다. 스팸 9개로 구성된 스팸8K호(2만8640원)가 2위였고, 식용유 등이 섞인 스팸 복합세트가 3·4·6위를 차지했다. 롯데마트는 지난해 추석 때 매출이 높았던 10개 품목 가운데 2·4위가 스팸 복합세트였다. 뉴코아, 엔시(NC)백화점, 2001아울렛, 동아백화점 등 다양한 형태의 오프라인 유통 채널을 가진 이랜드 리테일이 집계한 추석 명절 선물 인기 순위에서도 1위는 스팸과 식용유를 섞은 ‘스팸N호’였고, 여기에 참기름을 추가한 ‘특선 N호’가 3위에 올랐다. 이랜드 관계자는 “단일 제품도 인기지만, 최근에는 식용유 등이 섞인 복합세트의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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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매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에스케이(SK)플래닛 11번가 관계자는 “사실상 명절 선물 1위는 스팸이다. 매출이 해마다 20% 가량씩 느는 상황이라 명절 선물에서 존재감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업계 “불황·김영란법이 인기 원인”

스팸이 명절 선물세트로 만들어진 것은 1987년 제일제당이 스팸을 국내에서 생산한 직후인 1980년대 말부터다. 하지만 지금처럼 실속형 선물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1991년 1월 설을 앞두고 한 일간지는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판촉부 김 아무개 부장이 추천하는 명절 선물”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를 보면 1~2만원대 저가 선물부터 5만원대 이상의 고가 선물을 분류했는데, 스팸은 5만원대 이상의 고가 선물로 분류돼 있다. 당시 340g짜리 캔 제품 하나의 소비자가가 2200원으로 지금(5880원)보다 쌌지만, 선물세트는 스팸 개수도 많이 들어있고, 다른 고급 햄과 참기름 등도 포함돼 가격이 비쌌다.

초기에는 소 갈비나 조기 같은 전통적인 명절 선물에 밀려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 계기가 등장했는데, 바로 불황이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뒤 스팸 선물세트의 매출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는 게 CJ제일제당 쪽 분석이다. 회사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대형마트와 할인점이 급성장한 것과 맞물려 중저가 실용 선물세트가 인기를 끌었다. 스팸과 식용유·참기름 등으로 구성된 가공식품 선물세트가 히트상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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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선물세트 매출이 본격적으로 집계된 것은 2008년께부터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터진 2008년 350억원이었던 스팸 선물세트 매출은 이듬해 650억원으로 86%나 뛰었다. 가장 큰 매출 증가 폭이 이때 기록됐다. 그 뒤로 2012년까지 매해 20~30%씩 고속 성장을 기록했다. 불황이 스팸 시장을 키운 셈이다. 최근 들어서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한 몫 했다. 법이 정한 5만원 이하 선물로 가장 적당한 제품이 바로 스팸이었다. 법 시행 첫 해인 2016년 스팸 선물세트의 매출은 1790억원이었지만, 이듬해에는 2130억원으로 19% 늘었다. 이는 2012년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이다. 모바일 상거래업체인 티몬의 경우, 2017년 추석 때 스팸 매출액이 전년보다 무려 635%나 뛰었다. 티몬 관계자는 “김영란법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인 사로잡은 맛도 비결

불황과 ‘김영란법’이라는 사회적 요인도 있지만, 1987년 첫 출시 때 70억원에 불과하던 스팸 선물세트 매출이 30년 뒤 3580억원으로 늘어나게 된 배경에는 문화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일단 스팸의 맛 자체가 한식, 그 중에서도 쌀밥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가 나온다. 푸드 칼럼니스트 이해림씨는 “감칠맛이 강하고 짠맛·단맛도 있어 흰밥과 잘 어울린다”며 “부대찌개나 김치찌개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국물 요리 활용도가 높은 것도 인기 비결”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이 늘 먹을 수 있는 ‘밥 반찬’이라는 인식이 확산하자 업체들이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선 것도 매출을 늘린 요인으로 꼽힌다. 2002년 배우 김원희를 모델로 한 텔레비전 광고에 처음 등장한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라는 광고 카피는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듣는다.

스팸메일의 어원이기도

스팸은 미국의 육가공업체인 호멜사가 1937년 7월5일 처음 출시했다. 스팸이란 이름은 ‘양념된 햄’(Spiced ham)을 줄인 말이다

대공황 직후 발매된 스팸은 1930년대 후반 미국 저소득층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군이 전투식량으로 채택하면서 미군이 주둔한 국가에 스팸이 자연스럽게 전파됐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소바(메밀국수)와 오니기리(주먹밥)에 스팸을 사용한다.

스팸은 한국전쟁 뒤 미군 피엑스(PX)에서 밀반출돼 암거래되는 상품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기도 했다. 속칭 ‘미제 아줌마’라는 보따리장수들이 서울 한남동이나 평창동 등 부유층이 살던 곳에서 스팸을 팔았다. 이때 ‘고급품’이라는 인식이 대중 사이에서 생겼다. 1989년 미국 상원에 보고된 ‘주한 미군 부대 피엑스 암거래 보고서’는 한국 암시장서 거래되는 스팸이 연간 114만캔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스팸은 인터넷 시대의 부정적 현상 가운데 하나인 스팸메일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제품 출시 때 호멜사가 엄청난 광고를 한 탓에 ‘광고 공해’라는 지적이 나왔는데, 이를 빗댄 말이다. 그만큼 우리 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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