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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에 전례 없는 2024년 12월 3일의 계엄 선포와 그에 맞선 시민 항쟁, 그리고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거대한 파고 속에서 ‘팬덤’은 단순한 취향 공동체를 넘어 민주 시민으로 서는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신간 팬덤에서 자유로>는 그 격랑의 시간 동안 광장에 선 팬덤들을 심층 인터뷰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한국 팬덤문화의 독보적 결집력이 어떻게 역사적 변곡점을 만들어냈는지 생생하게 기록한다.

책은 대전과 서울의 두 광장을 주요 무대로 삼아 록과 인디밴드, 게임, 뮤지컬, 애니메이션, 스포츠, 한복 등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닌 27명의 팬덤 인터뷰이를 따라간다. 각자의 응원봉과 깃발이 뒤섞인 장면은 2016~2017년의 단색 촛불을 넘어, 정체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2024~2025년의 다색 광장을 상징한다. 팬덤의 언어는 해시태그와 ‘총공(총공격)’, ‘탈빠(탈퇴)’ 같은 실천의 문법으로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온라인에서 다져진 조직력은 오프라인에서의 연대와 안전, 배려의 규범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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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공포와 무력감으로 얼어붙었던 시간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으로 전환해 낸 시민들의 선택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누군가는 병동의 밤 창가에서, 누군가는 남태령의 검문소 인근에서, 또 다른 이들은 여의도와 은하수네거리의 밤샘 지킴이로 현장을 지켰다. “모두가 광장에 갈 수 없다면, 갈 수 있는 사람이 간다”는 태도와 “우리를 광장에 두고 가지 말라”는 호소, “사랑과 대연대”를 함께 외치는 목소리는 민주주의가 제도만이 아니라 습속과 감수성, 생활의 기술 위에 선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 책이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왜 한국의 팬덤인가’라는 물음이다. 한국의 팬덤은 깊이 있는 몰입과 명확한 규범을 바탕으로 공동의 목적을 향해 신속하게 자발적 행동을 조직한다. 선을 넘는 행위에는 단호히 선을 긋되, 서로의 안전을 기본값으로 삼는 참여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현장에서 확산시킨다. 콘텐츠 세계관의 언어-게임, 만화, 뮤지컬 등에서 축적한 상징과 규칙-가 권리와 존엄, 그리고 운명을 해석하는 ‘시민 세계관’으로 번역되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응원봉과 깃발이 만들어내는 가시성의 정치는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법을 가르쳤고, 다름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미덕을 광장 한복판에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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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역시 현장의 결을 따라 정교하게 짜였다. 프롤로그는 계엄의 밤부터 탄핵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며 독자를 광장으로 이끈다. 이어지는 1부는 “대전, 빛의 광장에서 덕후를 만나다”라는 부제 아래, 지역 광장의 꾸준함과 다정함을 담아 ‘노잼도시’라는 편견을 깨는 생활 민주주의의 현장을 보여준다. 2부 “서울, 빛의 광장에서 덕후를 만나다”에서는 대도시의 다층적 장면들 속에서 가시성과 교차성, 안전의 규범이 얼마나 빠르게 자리 잡는지 추적한다. 에필로그와 부록은 개인의 서사가 공동의 역사로 엮이는 경로를 정리하며, 독자가 사건의 앞과 뒤, 그리고 그 이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편집부가 꼽은 이 책의 핵심은 첫째, 현장성이다. 깃발 제작과 자원봉사, 시민 발언과 지역·중앙의 교차 참여 같은 세부 장면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 스펙트럼의 폭이다. 록과 한복, TRPG와 웹소설, 탐조와 뮤지컬, 그리고 ‘슬램덩크’까지 이어지는 팬덤의 다양성은 한국 대중문화의 깊이를 새삼 확인시킨다. 셋째, 스스로 생성한 윤리와 규범이다. 평등 수칙, 성중립 화장실, 안전 배려와 같은 합의는 팬덤이라는 자율 공동체가 민주주의의 일상적 운영 원리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넷째, 언어의 혁신이다. 팬덤 용어가 정치 언어로 전환되는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말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교육적 가치다. 청소년·뉴비·고인물의 세대별 인터뷰 배치는 시민교육의 텍스트로도 활용될 만큼 균형 잡힌 시선과 사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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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은 ‘우리는 원래 여기 있었다’는 증언”이라며, 팬덤이 취향의 다른 이름이자 서로를 지키는 기술, 그리고 민주주의를 다시 작동시키는 생활의 문법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팬덤의 언어로 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회복 서사이며, 광장의 밤을 지나 오늘의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다시 돌보는 법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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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천둥

저자소개 : 저자 또한 인디밴드 국카스텐의 덕후이자 마음속은 늘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과 어떻게 행동할지 울렁이고 있는 민주시민이다. 학부모 안내서<어서 와, 학부모회는 처음이지?>, 에세이<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 <우리라도 인류애를 나눠야지>, 소설<돌멩이를 치우는 마음>, 동화<단톡방이 사라지다!>, <단단한 미래>를 냈다.

<이 기사는 모두의책에서 제공한 정보기사로 한겨레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