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빛고을 광주는 현대미술의 최전선이다.
80년 항쟁의 중심이던 광주 금남로 옛 도청 뒤 땅 밑에서 요즘 세계적 규모의 미술난장이 펼쳐지고 있다. 60~80년대 시대적 억압에 맞섰던 세계 방방곡곡 작가들의 리얼리즘 그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실과의 접점을 고민하는 국내외 미디어아티스트들도 역대 최대 규모의 기획전시를 벌였다. 박찬욱·박찬경 형제 감독도 대중에게 내보이지 않았던 내밀한 사진들과 신작 영화들을 들고 와서 첫 회고전을 꾸렸다.
이 작품마당들은 2년 전 개관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의 2000평 넘는 지하 전시장 곳곳에서 최근 2주 사이 잇따라 개막했다. 지난해 전당을 휩쓸고 간 국정농단 파문의 상처를 딛고 기획진과 전당 실무자들이 야심차게 꾸린 결실이다.
1960~80년대 세계 리얼리즘 회화의 유장하고 비장한 역사가 전당 전시장에 처음 들어왔다. 인종차별을 규탄한 미국 정치미술의 거장 리언 골럽의 <백색부대> 연작과 최민화, 홍성담 작가의 광주항쟁 연작들이 마주한 풍경이 애호가들을 전율하게 한다. 김성원 문화창조원 감독과 국제기획자 김승덕씨, 프랑크 고트로가 원내 복합3·4관에 펼친 기획전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7월8일까지)는 참여미술의 장대한 파노라마다.
반전, 반독재, 민족해방, 인권투쟁 등의 당대 정치 이슈에 붓질로 대응했던 25개국 작가 50여명의 회화, 드로잉, 판화 170여점이 나왔다. 프랑스 퐁피두센터와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등 세계 32개 소장기관에서 대여한 출품작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세계사의 중요 장면을 돌아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1980년대 국내 민중미술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아이슬란드 거장 에로의 그림들과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랑시야크와 작가그룹 ‘코오페라티브 데말라시’의 냉소적인 풍자화, 인도·동남아·일본 작가들의 사회적 리얼리즘 회화들도 눈으로 포식할 수 있다. 마오쩌둥, 체 게바라, 마틴 루서 킹 등 당대 주요 위인들의 사후 모습을 충격적으로 부각시킨 옌페이밍의 연작들로 끝맺는 에필로그도 강렬하다.
■ 박찬욱·박찬경 형제의 회고전 ‘파킹찬스’ ‘휘-휘-호호호~’
박자를 늦춘 북한 가요 ‘휘파람’의 낭랑하면서도 애절한 노랫소리가 울려퍼진다.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 <올드보이> 등을 만든 박찬욱 감독과 동생인 박찬경 작가가 복합5관에 펼친 ‘파킹찬스’는 처음 공개하는 신작 <반신반의>를 비롯해 그간 함께 만든 6편의 중단편 영화와 사진·뮤직비디오 등을 선보였다. 그들이 가장 면밀하게 다뤄온 남북 분단을 다룬 영화·사진 작업들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박찬경 작가는 독서하고 하모니카를 부는 북한 인민군 소년병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상상하며 만든 사진 작업 <소년병>, 북한 무명전사 무덤을 찍은 사진 연작들을 내놓았다. 탈북자·입북자 취조실을 배경으로 이중스파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두 형제의 단편영화 <반신반의>에서는 초현실적이고도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구원과 욕망의 문제를 꺼내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상영 공간이 영화 속 남한 취조실을 재현한 것이고, 반대편에 역시 영화 배경인 북한 취조실의 소품들을 설치작품처럼 배치한 구성이 재미있다. 서구 미술관의 명작들을 손떨림에 마구 흔들리는 컷으로 찍어놓고 명작들과 나누는 대화라고 설명판에 풀이해놓은 박찬욱 감독의 사진들도 그의 내면을 뜯어볼 수 있는 감상거리다.
■ 미디어아트로 보는 ‘감각과 지식’
창조원 현관과 지하 창제작센터 스튜디오 2곳에 차려진 ‘감각과 지식 사이’전(25일까지)은 일본의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기획자 아베 가즈나오가 국내외 작가 15명과 손잡고 마련했다. 애초 지난해 10월 개막할 예정이었으나, 운영 주체(아시아문화원)와 예산 배정 기관(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이원화된 비효율적 구조와 기획자와의 소통 혼선 등으로 미뤄져 이달 들어서야 개막했다. 첨단기술에 치중했던 기존 미디어아트의 편향을 성찰하고, 사회적 변화, 삶의 방식, 공공성, 정치 등과의 접점을 모색하는 실험적 작품이 여럿이다. 특히 2년 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 작가였던 문경원, 전준호씨는 비무장지대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소재로 분단에 얽힌 마을의 역사를 애니메이션, 슬라이드 등과 엮어 상상력이 돋보이는 수작을 만들어냈다.
모두 합쳐 16억여원이 들어간 세 전시는 다양한 콘텐츠와 탄탄한 짜임새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일반 관객들의 외면으로 전시장은 텅텅 비었다. 앞서 창조원이 지난해 8월부터 복합1관에서 열고 있는 아르헨티나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의 ‘행성 그 사이의 우리’전(25일까지) 역시 12억원 넘는 예산이 투입됐지만 입장객은 2만5천명에 그쳐 관객과 소통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술계 한 평론가는 “지하에 자리한 전당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 떨어지는 게 문제다. 홍보마케팅뿐만 아니라 전당 부근의 도심 문화재생 전략과도 연계해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899-5566.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