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미술판에 참여미술(민중미술) 계열 작가들의 작품마당이 잇따라 깔렸다. 화단의 화제를 모으며 18일 끝난 원로작가 손장섭씨의 회고전을 필두로 노원희, 박찬경, 최민화, 이상호, 전정호씨 등 1980~90년대 두각을 드러낸 민중미술 선후배 작가들의 전시다. 정권 교체와 맞물리면서 때를 만난 듯 차려진 전시들은 특유의 현실 비판적 작업들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중견작가 노원희(69)씨의 개인전(서울 구기동 아트스페이스 풀)과 박찬경(52)씨의 개인전(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은 민중미술 진영 내의 세대간 차별성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눈길을 줄 만하다. 노 작가는 80년대 초 민중미술 출발점이 된 ‘현실과 발언’ 동인의 창립멤버로서 30여년간 리얼리즘 회화의 암중모색을 지속해왔다. 이와 달리 박 작가는 민중미술이 퇴조한 90년대 이후 현대미술 어법으로 근대성과 역사를 성찰하며 참여미술의 활로를 모색해온 포스트민중미술 세대의 대표작가다. 두 전시들은 이런 차별적 맥락 아래 세대를 달리하는 두 작가가 변화된 한국 사회의 역사와 현실을 각기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노 작가의 근작들은 2013년 부산 동의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고 서울에 거처를 옮긴 뒤로 수년간 겪은 사회적 사건과 일상을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위 중인 텐트와 그 앞에 서 있는 경찰의 모습을 온통 어두운 푸른빛의 색조로 흐릿하게 묘사한 <청와대 길목>과,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사건 뒤 다시 등장한 대북방송 확성기를 도심의 빌딩 아래쪽에 생경하게 배치한 <평화를 말하는 시간> 등 최근 출품작들은 작가가 삭히고 삭혀 내놓은 현실 인식의 단면들이다. 그의 그림들은 정밀한 세부묘사 대신 일상 풍경 속에 상징물을 부각시키거나 말을 집어넣는 등 암시성이 강한데, 80년대 이래 꾸준히 유지해온 화풍이라 할 수 있다. 무대 개념을 끌어들여, 화가가 객석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의 비극을 다룬 연극을 지켜보는 초현실적인 그림(<관객중에>) 등도 눈길을 붙잡는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사회적 사건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변형하거나 부각하면서 당대의 정서, 감정을 기록하는 특유의 작법을 꾸준히 변모시키며 작업해왔음을 작가는 드러낸다.
박찬경 작가의 전시를 대표하는 작품은 3채널 영상(연속된 3개의 화면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물) <시민의 숲>이다. 한국 근대사의 수레바퀴 아래 숨진 숱한 원혼들에 대한 세련된 위령곡 성격을 띠는 작품이다. 작가는 민중미술 대표작가 오윤의 대작 <원귀도>와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를 영상 속에 실현해놓았다. 젊은이들은 숲속에서 굿판을 열어 일제강점기 독립항쟁,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등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불러들인다. <원귀도>에 나오는 해골유령의 브라스밴드가 실제로 등장해 애도의 행진을 벌이고 기물을 불태우며 초혼제를 올리기도 한다. 작가는 2000년대 이래로 ‘아시안고딕’이라고 명명했던 무속신앙, 민족종교 등을 다루는 연작 다큐 작업을 해왔는데, <시민의 숲>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무속 등에서 다루는 귀신과 심령의 세계에 천착해 한국인의 내면에 뿌리박은 두렵고도 오묘한 심리를 이미지로 추적하는 작업이다. 굿판의 명기들을 나무판에 붙여 만든 작품들과 북한산 승가사 가는 길의 현실 풍경을 찍은 슬라이드 작품들, 작가의 주관에 따라 재구성된 한국, 중국의 미술사 작품 도판들도 이런 맥락 아래 등장한다. 최근 수년 사이 진보적 작가들 사이에 유행이 된 귀신 좇기, 심령 탐구의 흐름을 응집한 듯한 근작들은 한국인들 뇌리 속에 유령처럼 남은 전통 잔재의 감각을 실체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귀신 탐구’로 요약되는 작업 틀이 필연적으로 시대 퇴행적 속성을 띠게 되므로, 건실한 현실적 전망을 길어올릴 수 있느냐는 의문에 직면한다는 점은 작가가 딛고 서야 할 한계점으로 비치기도 한다. 두 전시 모두 7월2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각 전시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