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색 짙어진 서울 북촌거리의 국제갤러리는 요즘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을 추억하는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70년대부터 80년대초까지 국내 화랑가를 도배했던 벽지 같은 그림들이 전시장을 채웠다. 형상이 사라지고 흰색, 검은색, 회색 등의 단색조로 화폭을 물들인 원로 작가들의 모노크롬 그림들이다. 지난해부터 국제갤러리 등 일부 화랑들은 국제시장에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상품으로 70년대 단색조 그림을 본격적으로 띄우기 시작했다. ‘단색화의 예술’이란 제목 아래 기획자 윤진섭씨가 연출한 이 전시는 최근 불붙은 모노크롬 그림 열풍의 실태를 보여주는 ‘간보기’라 할 수 있다.

기획자는 갤러리의 1, 2, 3관 전관에 김기린, 박서보, 고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 원로 작가 7명의 70년대 대표작 50여점을 작가별로 구획해 보여준다. 화폭 뒤에서 물감을 밀어올려 방울 모양의 무늬를 점점이 빚어내거나(하종현), 연필선을 화면 가득히 리듬감있게 되풀이해 그리거나(박서보), 젖은 한지가 겹쳐진 질감 효과를 강조하며(정창섭), 두툼한 물감층을 뜯어낸 마티에르(질감)의 느낌을 증폭시킨(정상화) 작업들이다. 전통 색채의 재해석을 앞세운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과거를 보여주는 유물 같은 실체들이다. 초창기 모노크롬의 정신성을 보여주는 대작 중심으로 작품을 고른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납골당 같기도 한 말쑥한 백색의 전시공간에서 모노크롬 그림들의 새옹지마 같은 이력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모노크롬 화풍은 70년대 초반 박서보 등 몇몇 작가들이 처음 시도했다. 그들은 75년 ‘에콜드서울’이란 그룹을 형성하면서 화단을 지배하는 집단으로 떠오른다. 60년대 서구 색채추상(앵포르멜)에 빠졌던 그들은 재료나 색채 자체에 골몰했고, 한국 전통미의 특징을 한국적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려 했다. 50~60년대 고루한 정물 풍경 취향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중심의 화단 풍토를 모더니즘으로 바꿔 제도권의 새로운 권력이 되겠다는 욕망도 컸다. 이우환이 연결시켜준 당시 일본 평단의 호평에 힘입어 모노크롬은 70~80년대 화단 권력으로 등극했지만, 당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은 반발을 불렀다. 80~90년대 참여미술계의 후배 작가들은 몰지성적인 ‘꼰대들 그림’이라고 등을 돌렸고, 팝아트를 선호하던 미술시장은 최근까지도 ‘재미없다’고 눈길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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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이래 푸대접 받아온 모노크롬이 새삼 상품으로 각광받고 미술관식 회고전까지 열리게 된 건 격세지감이다. 1일 개막 간담회에 참석한 이우환 작가는 모노크롬 작가들이 ‘당대에 침묵의 저항을 했던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불렀다. 시대와 담쌓고 모호한 전통미 내세운 그림을 제자들에게 강제하고, 박정희 정권의 민족기록화 사업에도 일부 동참했던 모노크롬 작가들이 저항했다는 논리는 국내에서 두루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니다. 물론 전시 작품들은 서구 미니멀 그림과 다르다. 바람결을 강렬한 터치로 찍은 이우환의 ‘바람’ 연작과 검은 먹색의 번짐이 갖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윤형근의 맨화폭 그림처럼 회화의 정신성을 고민한 수작들은 많다. 힐링 전시란 평도 나오지만, ‘단색화의 예술’전은 시대 앞에 굴절을 거듭한 한국 현대미술사를 되새김하며 보는 게 제맛이다. 10월19일까지. (02)735-8449.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