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품 창고 구석의 책꽂이에 헌법·민법·국제법 등의 법학 서적들이 보였다. “창고의 책들로 사법시험을 준비해도 되겠다”고 하자, 그는 “가능할 것”이라며 웃었다. 창고엔 숟가락·도자기·냄비·첼로가방·가구들이 빼곡했다. “여기 소품들로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의 세간살이를 다 채울 수 있죠.”
먼지가 덮인 ‘더 퍼펙트 넘버’(완전한 수)란 수학책도 눈에 띄었다. 현재 145만명을 모은 영화 <용의자 엑스(X)>(감독 방은진)에서 수학 천재교사 ‘석고’를 맡은 배우 류승범이 영화에서 끼고 다닌 책이다. 다른 수학 원서에 책 표지만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표지가 실제 원서와 똑같으면 저작권에 저촉될 수 있어 여러 외국 수학 서적들의 표지들을 조합해 만들었죠. 표지를 짙은 청색으로 만들어 어두운 ‘석고’의 분위기를 표현했고요.”
31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서 만난 소품업체 ‘모도아트’의 김순근(36) 팀장은 “관객들은 모르겠지만…”이라며, <용의자 엑스>의 ‘숨은 소품’ 몇 가지를 꼽았다.
“석고의 방의 시계가 총 10개예요. 숫자에 민감한 캐릭터이니까요. 집착하는 성격을 보여주려고 연필통의 연필들도 모두 뾰족하게 깎아두었죠. 옆집 여자 ‘화선’(이요원)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색을 보라색 계통으로 잡았는데, 화선이 전남편의 목을 졸라 죽일 때 쓰는 (전깃줄이 달린) 다리미도 흰색 바탕에 보라색이 있는 걸 구입했죠.”

“이건 (소품 담당들의) 잔재미인데”라며, ‘화선’의 조카가 학교에서 받은 상장과 트로피 소품을 제작하면서, “상장 속의 교장선생님 이름을 내 이름으로 적었다”고 했다. 화선이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어 석고에게 건넨 종이는 영화 막판 눈물을 자극하는 장치인데, “이요원씨가 아니라, 미술팀 스태프가 쓴 글씨”라고 했다. 그는 “화면에선 쓱 지나가는 그런 작은 소품들이 모여 (영화 흐름을 이어가는) 하나의 큰 이미지를 만든다”며 “카메라 앵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품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어떤 소품은 중요한 상징물이 되기도 하고,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용의자 엑스>에서 화선이 이사를 와 석고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며 짓는 미소는, 석고가 화선이 살인 혐의에서 벗어나도록 알리바이를 짜주며 희생하는 동기가 된다. 그때 음식인 ‘잡곡 주먹밥’이며, 화선이 석고를 위해 싸준 ‘데리야키 치킨’ 도시락 모두 미혼인 김 팀장이 만들었다. “영화가 보통 외진 곳에서 촬영하니까, 재료를 사다 현장에서 만드는 게 낫다 싶어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물건이 언제 쓰일지 몰라 고물상에서 물건을 가져오기도 하고, “영화에 딱 맞는 그림이 있으면 화가에게 부탁”하기도 해야 하며, 이번 영화의 노숙자촌처럼 없던 공간을 꾸미고 소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책이 많았던 석고의 방은 폐업하려던 부산 헌책방 두 곳의 책을 모두 사서 채웠다. 때론 자신이 입던 작업복들을 이번 영화의 경찰서처럼 형사들이 입는 옷으로 걸어놓기도 한다. 석고가 화선에게 수차례 전화하는 언덕 위 공중전화 부스는 고속도로 터널 안에 긴급전화용으로 설치하려 했던 것을, 한 전화부스 제작업체한테서 어렵게 구했다.
“그런데 그 부스 안에 뜻밖에도 거울이 달려 있었죠. 영화에선 그 거울에 류승범씨의 표정이 담기는 등 중요하게 쓰였더군요. (그 소품을 얻은 게) 운이 좋았어요. 구하기 힘든 것을 찾아냈을 땐 기분이 좋아요.”
요즘 한석규가 주연인 영화 <나의 파파로티>에 참여하느라 “두 달 넘게 집에 못 갔다”는 그는 가끔 “왜 이렇게 험한 일을 하나”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베트남전이 배경인 2008년 영화 <님은 먼 곳에>에선 배를 타고 가는 병사 200명의 군용 가방을 두둑하게 보이게 하려고, 부산 다대포바다 앞에서 밤새 5톤 분량의 왕겨를 가방에 채운 적도 있다.
단편영화 연출을 준비하다, 영화 세트 제작 일을 거쳐 소품 담당을 한 지 7년째인 그는 “작업강도에 비례해 소품 담당 스태프의 낮은 임금도 현실화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소품이 없으면 영화 세트 공간을 채울 수 없으니, 내가 없으면 영화를 못 찍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영화의 모든 물건을 내가 관리한다는 매력도 있다”고 했다.
지방촬영을 마치고 이날 돌아온 김 팀장이 창고 밖으로 나오자, 두 마리의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올해 초 드라마 <난폭한 로맨스>에 출연시키려고 사온 ‘녀석’들이다. 그는 실제 출연한 한 마리는 “합격”으로, 같이 촬영장에 갔다가 캐스팅되지 못하고 돌아온 한 마리는 “퇴짜”로 부른다며, 두 개를 정겹게 바라보았다.
파주/글 송호진 기자
영상·사진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