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속 정유라. 프로그램 갈무리
<밀회> 속 정유라. 프로그램 갈무리

역대급 캐릭터가 등장했다. 기업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가 하면, “내가 누군지 아냐”며 교수와 교사, 세신사와 안마사에게 갑질을 일삼는다. ‘사이비 종교’, 무당, 빙의 같은 오컬트 요소도 갖췄다. ‘호스트바’ ‘출생의 비밀’ 같은 막장 요소는 기본이다. 욕하면서 보는 맛이 백배는 더해진 덕에, 그가 등장하면 시청률이 치솟는다. 그를 쫓던 <뉴스룸>(제이티비시)은 시청률 8%가 나왔다. 작가들은 “이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는 못 쓸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로 절필을 선언하고, 제작사들은 입맛을 다신다. “드라마로 만들면 역대급 시청률이 나오겠는걸.” <무한도전> <막돼먹은 영애씨> 등 자막 패러디도 넘쳐난다. 의문을 부른다. 그간 긴가민가했던 드라마 속 암 유발 캐릭터들이 알고 보면 이 실존 인물의 모사본은 아니었던 걸까? 드라마가 먼저 보여줬던 ‘드라마 속 최순실’ 캐릭터를 돌아본다.

<밀회> 속 호스트바 남성(오른쪽). 제이티비시 제공
<밀회> 속 호스트바 남성(오른쪽). 제이티비시 제공

부정입학? 호빠? <밀회> 백 선생 정성주 작가는 돗자리 깔아야 한다. 2014년 방영한 <밀회>(제이티비시)는 알고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녀 사이가 최순실씨와 똑 닮았다. 드라마 속 백 선생은 홀로 딸을 애지중지 키워 예체능 특기자로 대학에 보낸다. 백 선생의 딸 이름은 정유라. 현실의 승마와 달리 피아노를 전공한다. 백 선생 직업은 역술인. 서한예술재단 이사장의 투자 자문을 맡는 등 상류층에 투자 흐름을 코치해준다. 이사장과의 돈독한 관계를 빌미로 정유라를 서한음대에 부정입학시킨다. 그 딸도 현실 판박이다. 출석도 하지 않고 그룹 과제도 매번 빠지는데 학점을 받는다. 백 선생이 지도교수를 찾아가 학점 특혜를 부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백 선생이 좀 낫다. “이런 뭐 같은 게 다 있냐”며 폭언을 일삼았다는 최순실씨와 달리, 예의를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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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예술재단 딸 서영우는 최순실 캐릭터의 또 다른 분신 같다. 호스트바 출신 남성을 만나 그를 사업파트너로 둔갑시켜 상위 1%를 위한 수입의류매장을 차려준다. ‘최순실 막장 드라마’를 사실상 기획한 이의 이름도 잠시 등장한다. 수시 지원자 예비소집일에서 조교가 출석을 부른다. 125번 정유라. 126번 최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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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화> 정난정. 문화방송 제공
<옥중화> 정난정. 문화방송 제공

국정농단? <옥중화> 정난정 등 최순실 사태는 ‘과연 누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나?’라는 의혹을 낳고 있다. 드라마에서도 최고 권력자를 꼭두각시 삼아 배후에서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들이 많다. 방영 중인 <옥중화>(문화방송)의 정난정이 대표적이다. 조선 왕후로서는 최고의 권력을 누린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20년간 전횡을 저지른다. 안보부터, 청와대 인사, 경제정책까지 주무른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처럼, 정난정도 외교와 국가안보 문제까지 총체적으로 개입한다. 최순실 사태로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처럼, 조선 중기도 정난정으로 위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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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데이즈>(2014년·에스비에스)의 재벌 총수 김도진은 미국 무기회사 팔콘의 컨설턴트 이동휘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비선실세가 된다. 1998년 아이엠에프 당시 미국의 무기를 한국에 팔려고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을 계획한 김도진 일당은 이동휘가 대통령이 된 뒤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기황후>(2013년·문화방송)의 왕비 기승냥과 신하 백안은 유약한 왕 타환 뒤에서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인다. <빛나거나 미치거나>(2015년·문화방송)에서 왕족의 종친이고 고려 왕조를 꿈꿔왔던 개국공신 왕식렴은 호족들 대표와 개국공신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나라를 폐하와 함께 세운 개국공신들 아닌가? 앞으로 고려의 모든 일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결정할 것이다!” “언니 옆에서 의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내가 이만큼 받고 있잖아”라고 말했다는 최순실씨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쓰리 데이즈> 김도진. 프로그램 갈무리
<쓰리 데이즈> 김도진. 프로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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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실. 문화방송 제공
<선덕여왕> 미실. 문화방송 제공

흑주술로 왕실을 조종하다 <해품달> 속 무당 주술(미신)의 힘을 빌려 권력을 주무른 점에서는 <선덕여왕>(2009년·문화방송)의 미실도 떠오른다. 최순실씨의 아버지 최태민은 기독교·천도교·불교를 합친 ‘영혼합일설’을 주창한 기이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 아버지는 최순실씨가 꿈을 통해 자신의 예지력을 이어받았다고 여겼단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추진하며 우주, 혼, 기운을 자주 언급한 것이 그와 관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미실은 색공술을 무기로 진흥왕을 휘어잡은 뒤, 진흥왕이 죽자 꼭두각시 왕을 앉혀놓고 ‘미실의 시대’를 선언한다. <해를 품은 달>(2012년·문화방송)에서 조선 최고의 무당은 흑주술로 왕세자비를 죽이려 하는 등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했고, <주몽>(2006년·문화방송)에서 부여의 왕과 왕자들은 국가 대소사를 신녀에게 물어왔다. 대한민국은 2000년 전으로 회귀한 것일까?

<해를 품은 달> 무당. 문화방송 제공
<해를 품은 달> 무당. 문화방송 제공

<신의 선물-14일> 대통령 하야 모습. 에스비에스 제공
<신의 선물-14일> 대통령 하야 모습. 에스비에스 제공

드라마 속 최순실들의 최후…현실은? 드라마 속 최순실들은 나름의 응징을 당한다. 세상의 권세와 부를 모두 가진 것처럼 행동한 대가를 달게 받았다. <밀회>의 백 선생과 정유라는 비자금 조성이 발각되자 해외로 도피한다. <쓰리 데이즈> 김도진은 폭탄이 터져 죽는다. <옥중화> 정난정은 독을 먹고 자살한다. 국정 농단을 공모하거나 그들한테 놀아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최고권력자도 책임을 진다. <신의 선물-14일>(2014년·에스비에스)의 대통령 김남준은 측근인 비서실장 이명한과 영부인이 자식의 살인혐의를 벗기려고 무고한 시민을 이용한 사실을 알고 책임을 통감하고 하야한다. <야왕>(2013년·에스비에스)에서는 검찰이 비리의 온상 청와대를 당당하게 압수수색한다. 현실의 그들은 어떤가?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