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다! 침대에 벗고 누워 있는 여자가 의미하는 건 뭘까? 지난 8일 시작한 금토드라마 <굿와이프>(티브이엔) 1회에서 스쳐 지나듯 나온 장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극중 변호사 김혜경(전도연)을 돕는 ‘여자’ 조사관 김단(나나)이 누군가의 물건을 훔쳐 나가는 모습 뒤로, 침대에 벗고 누워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등장했다. 원작의 김단 캐릭터인 칼린다 샤마(아치 판자비)는 남자, 여자를 모두 좋아하는 양성애자다. 김단도 양성애자란 소린가? <굿와이프> 제작진은 <한겨레>의 질문에 “우리는 양성애자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의 해석에 맡기겠다”고 말하지만, 이처럼 양성애자라는 암시는 곳곳에 심어둔다.
한국 드라마에서 양성애자(혹은 일지도 모르는) 주인공이 등장했다는 점은 놀랍다. 동성애 캐릭터가 거부감 없이 등장하는 시대이더라도, 티브이에서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힘겹기 때문이다. 지난해 방송한 드라마 <선암여고탐정단>(제이티비시)은 잠깐 등장한 극중 여고생끼리의 키스신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인 ‘경고’를 받았다. 당시 심의위원들은 “우리 사회의 인식이 동성애를 인정은 하되 권장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를 댔다. 이런 상황에 한국판 <굿와이프>에서 칼린다의 성정체성을 그대로 따를까는 방송사 안팎 관심사였다. 제작진이 ‘커밍아웃’하지는 않았지만, 김단이 조심스럽게 내디딘 한걸음이 한국 드라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동성애자-동성의 사랑-레즈비언-양성애자’로 조금씩 문을 열어온 한국 드라마 속 동성애를 짚어봤다.
1995년 단막극으로 첫선단막극 위주 방송으로 논란 피해가다2003년 <완전한 사랑> 홍석천 연기 뒤대중의 ‘동성애자 캐릭터’ 수용 열려
■ 95년 보수적인 드라마서 첫선 우리나라 최초 동성애 영화로 꼽히는 레즈비언의 사랑을 다룬 <금욕>은 1976년에 나왔을 정도로, 한국 대중문화는 은근 ‘오픈 마인드’였다. 그러나 티브이에서는 달랐다. 은퇴한 한 원로 피디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80년대에는 누군가 동성애 소재를 언급하면 정신이 있느냐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고 말했다. 티브이에서 금기가 깨진 건 피시통신의 등장으로 동성애 커뮤니티가 생기는 등 담론이 활발해진 1995년이다. 이해 단막극 <두 여자의 사랑>(문화방송)과 <째즈>(에스비에스)가 나왔다. 단막극에서는 실험적인 소재를 해도 된다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이후 <슬픈 유혹>(1999) <연인들의 점심식사>(2002) <완벽한 룸메이트>(2004) 등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동성애 소재는 단막극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다뤄졌다. 당시만 해도 주로 성정체성을 깨닫고 괴로워하는(<슬픈 유혹>) 등 동성애는 무거운 존재였다. 일방적인 사랑(<두 여자의 사랑>) 식으로 논란을 피해갔다. 이 원로 피디는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자살하는 식으로 동성애를 심각한 일로 다뤘다”며 “피디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심리 변화 등이 커서 드라마적 소재로 좋았고, 보는 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호기심을 갖고 엿보는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 고민거리에서 매력적인 존재로 그랬던 동성애자를 우리 주변에 사는 인물로 스며들게 만든 것은 2003년 <완전한 사랑>(에스비에스)부터다. 실제 커밍아웃한 홍석천이 맡은 홍승조는 시우(차인표) 때문에 힘들어하는 지나(이승연)를 보듬고 조언하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친구로 나와 당시 여자들 사이 게이 남자친구를 선망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는 2003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승조를 통해 동성애자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동성애자 캐릭터는 멋진 친구를 넘어, 밝고 쾌활한 인물로 드라마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급기야 <티브이엔>의 개국 드라마 <하이에나>에서 잘생기고 다재다능한 동성애자 석진(신성록)이 여심을 흔들었다. 2016년 <굿와이프> 김단은 한때 검찰수사관이었고, 놀라운 능력으로 재판의 판세를 뒤집는 실력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 키스까지 표현 방식도 진화 <굿와이프>가 놀라운 점은 ‘잠자리’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나오고 “우리가 그런 사이야”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동성애 캐릭터는 이제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들의 사랑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달랐다. 10년이 지나서야 동성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 묵인됐다. 2006년 <미스터 굿바이>에서는 주인공의 동생으로 나온 동성애자 로니(허정민)가 남자와 손을 잡고,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손등에 뽀뽀했다. 다만 극중 사랑의 상대가 외국 남자였다. 2010년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동성 커플의 사랑을 잔잔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담아낸 <인생은 아름다워>(에스비에스)에서는 한발 더 나아간다. 이상우, 송창의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있고,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떨리는 손으로 스킨십을 하는 듯한 암시를 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도 키스신은 보수단체들의 강력 반발로 무산됐다. 당시 동성애반대국민연합 등은 <인생은 아름다워> 규탄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선암여고탐정단>에선 여고생끼리의 키스신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지난해 <더 러버>(엠넷)는 동성 커플의 달달한 깨볶는 모습과 ‘섹스’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내보내기도 했다.
■ 배우 선입견 등 한계도 여전 <굿와이프>의 김단을 보면서 원작 팬들은 “우리나라도 이제 많이 개방됐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커밍아웃’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해 이후로는 양성애자의 정체성이나 동성애의 섹슈얼리티는 더이상 부각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동성애자 역에 대한 배우들의 선입견도 여전하다. 한 드라마 작가는 “대만의 경우 동성애자 역을 연기한 배우들이 큰 인기를 끌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는 드러내놓고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다. <미스터 굿바이>의 로니 역을 연기한 허정민도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 역할을 하겠다고 했을때 주변에서 미쳤다고 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지난해 <심야식당>을 리메이크하면서 원작에 나온 게이 역을 뺀 것을 두고 이 드라마를 쓴 최대웅 작가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역할을 진정성을 담아 제대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선암여고탐정단>의 키스신엔 징계를 내렸지만, 2010년에 방송한 <시크릿 가든>의 하지원의 영혼이 빙의된 현빈과 윤상현의 코믹한 남-남 키스신은 제재하지 않았다. 동성애를 여전히 흥밋거리로 취급하는 방송가의 문화도 아쉽다는 의견이 많다. 최대웅 작가는 “표현의 자유는 넓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