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끌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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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일, 지정생존자>(티브이엔)는 정치드라마를 대중화시켰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지점이 있다. 바로 배우 지진희의 연기 스펙트럼을 재확인했다는 것이다. 1999년 데뷔해 처음으로 ‘메인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2003년 <대장금>부터 <봄날> <결혼 못하는 남자> 등 16년간 사극, 코미디, 멜로, 심지어 스릴러까지 다양한 작품에 몸담더니, 이번엔 아무나 못 맡는다는 대통령까지 연기했다. “기존에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다양한 역할을 맡으려 한다”는데, 과연 ‘지진희는 ○○다’라고 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진희를 연기파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연기를 못하나? 아니다. 맡는 배역마다 안정감 있게 소화해내어 출연작들은 평타 이상을 쳤다. <애인있어요> 때는 ‘지진희 신드롬’이 불기까지 했다. 그럼 이건 뭘까? 데뷔 20년인 지진희는 그냥 지진희다. 그냥 ‘지진희’라는 하나의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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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드라마 피디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진희는 액션이 크지는 않지만 작은 움직임으로 섬세한 내면을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했다. 지진희는 아주 작은 디테일로 자신만의 색깔을 입힌다. <60일, 지정생존자>에선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박무진 환경부 장관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넥타이를 풀어헤치거나 안경을 쓰고 벗는 세심한 동작들을 고민했다. 최근 <한겨레>와 만난 그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임기 초 생기있는 모습과 임기 말 흰머리가 늘어난 사진에서 보듯 대통령은 엄청 무거운 자리다. 그 무게를 보여주려고 드라마 시작부터 서서히 살을 뺐다”고도 했다.

눈빛도 ‘지진희 장르’를 완성하는 요소다. 그의 전매특허인 눈빛 연기는 백마디 말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한 드라마 작가는 “이병헌과 함께 눈빛으로 연기하는 몇 안 되는 배우”라고 꼽았다. <애인있어요> 당시 그의 애절한 눈빛은 화제였다. 그는 “눈빛 연기 연습을 따로 하는 건 아니다”며 비결에 대해 “나도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애인있어요>를 하면서 눈빛이 너무 애절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어요. 말과 행동도 있지만 시청자들이 눈빛으로도 느끼는구나, 이걸 어떻게든 해내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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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제작 현장과 얼마나 잘 호흡하는가도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60일, 지정생존자>에 같이 출연한 한 배우는 지진희가 늘 현장에 일찍 오고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데 놀랐다고 했다. 지진희는 <60일, 지정생존자>를 촬영하면서 미용실에 가서 머리 손질과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직접 머리 손질을 하기도 했다. 극중에서 박무진이 일에 찌들어 머리를 만질 새도 없다는 점을 고려해 조금 서툴러도 현실감을 살릴 수 있다는 거였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매니저의 휴식 때문이었다. 매니저가 청담동 미용실까지 동행하면 5~6시간이 걸리는데 배우가 직접 현장으로 바로 가면 매니저가 쉴 수 있다는 거였다. 그는 “잘 쉬는 건 정말 중요하다. 주 52시간제는 꼭 지켜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밤샘 노동과 과로로 지친 드라마 제작 현실에서 그의 ‘휴식론’은 변화의 밑돌인 셈이다. 실제로 대통령이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도 그는 “수직구조를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수평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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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평가에 인색하다는 것도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작품에 빠져든 것은 2015년 영화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를 하면서 상대 아역 배우와 만나는 장면에서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을 때고, 그나마 연기에 여유가 생긴 건 2018년 드라마 <미스티> 때였다”며 자신한테 박한 점수를 준다. 하지만 부족한 점을 만회하려고 서두르진 않는다. “<대장금> 때 실력과 반비례로 인기를 얻었고 그게 많이 힘들었어요. 나는 이 정도의 인기를 받을 만한 실력이 아닌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10년이 지났을 때 진짜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10년 지난 뒤에도 잘 안 된 거 같아서 다시 10년을 달려왔어요. 그런데 이 역시 잘 안 될 것 같아서 또다시 10년을 계획하고 있어요.(웃음) 한가지 깨달은 점은 방심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연기는 반드시 좋아진다는 것이죠. 속도의 차이일 뿐. 맨 마지막 작품이 연기를 가장 잘한 작품이면 좋겠어요.” 20년간 안 좋은 이야기 한번 들리지 않는, 철저한 자기관리도 ‘신뢰감 주는 배우’를 빚었다.

차근차근 배우 인생을 밟아온 그는 나이듦 역시 순리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1971년생.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50대에 접어든다. “주름도 자연스러운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는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될 날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 나이에 맞는 멜로를 하고 싶은 욕망은 있다. “지금 저를 좋아하는 분들도 같이 늙을 거니 그들도 좋아할 멜로를 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지만.” 음, 욕심일까? 현실이 될 듯한데?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