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한 차탈회위크 유적 거주시설. 황소뿔 장식이 벽에 붙어 있고 주거시설과 인골이 매장된 무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이채롭다. 터키 앙카라 아나톨리아고고학박물관에 있다.
복원한 차탈회위크 유적 거주시설. 황소뿔 장식이 벽에 붙어 있고 주거시설과 인골이 매장된 무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이채롭다. 터키 앙카라 아나톨리아고고학박물관에 있다.

9000여년 전 그들에겐 ‘금수저’, ‘흙수저’가 없었다. 성별, 핏줄로 구분되는 가족조차도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세계적인 고고학 거장인 이언 호더(69)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8000~9000년 전 인류사상 최초의 신석기 농경주거지로 손꼽히는 소아시아 고원의 차탈회위크 마을터는 인류사의 상식을 뒤엎은 유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전체가 가족이었다. 동등한 넓이의 집터를 각기 꾸려 지붕 구멍을 통해 서로 오가며 소통하고 곡식을 나누고 후손을 함께 길렀다.

답사단이 유적을 찾아간 것은 지난달 20일 오전. 고도 코니아에서 1시간 가량 길을 달려 밀밭과 해바라기밭 사이에 있는 유적 둔덕에 이르렀다. 들머리 주거지 모형관에 이어 북쪽 언덕과 남쪽 언덕으로 나뉘어진 유적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2012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곳은 세계 최초로 계획 주거지를 꾸리고 농경생활을 한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여실하게 아롱져있다. 1958년 영국 학자 제임스 멜라트가 발견해 60년대 초 발굴한 뒤 93년부터 이언 호더 교수가 발굴작업을 25년간 벌이면서 160여곳의 주거 터를 찾아내 세계 학계에 큰 울림을 던진 현장이다. 올해가 발굴로는 마지막 졸업의 해라며 조사단을 맞은 이언 호더는 유적을 ‘역사의 집’이라고 부르며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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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신전 터도, 거리도, 무덤도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산 자들이 사는 집에 생활시설과 선조들을 묻은 무덤, 망자들을 기리는 제의의 상징물이 모두 함께 있었습니다.”

복원된 주거 터 한쪽에는 머리 없는 유골을 놓은 매장 흔적이 있고 벽면에는 황소뿔 장식과 사슴, 곰 등의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괴롭히는 장면, 거대한 독수리 등이 벽화로 그려졌다. 이 주거지 안에 최대 60구가 넘는 주검을 묻고, 틈틈이 선조들 유해와 유물을 꺼내 보면서 되살려낸 조상에 대한 기억과 제례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본드’(유대) 구실을 했다고 호더는 말했다. 선조들의 과거가 그들의 주검과 유물을 후대 확인하는 방식으로 계속 기억되고 전승되면서 마을 공동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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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그와 함께 돔으로 씌워진 언덕 위의 유적으로 올라갔다. 주거 터의 단면을 옆으로 펼쳐 보존한 북쪽 언덕 유적을 지나 기원전 7100년부터 기원전 6100년까지 주거 터 지층이 높이 10~20m로 층층이 포개진 남쪽 언덕 촌락 유적들을 살폈다. 차탈회위크 인들이 대대손손 쓰던 집의 천장, 벽을 허물고 그 위에 다시 집을 짓기를 거듭한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집을 숱하게 다시 짓고 쓰는 과정에서 선조들이 쓰던 토기, 신상 등의 물품을 다시 파내어 재활용하거나 기억의 대상으로 간직했다. 이채로운 건 부모 자식이 가족으로 무리지어 집을 쓰지 않고 아이들을 공동양육했다는 점이다. 이언 호더는 “주거지 인골 치아의 디엔에이를 분석해보니 혈연적 유사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면서 “유골들 성비도 큰 차이가 없어 남녀 모두 공동노동, 공동육아로 공동체를 꾸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물질을 다루는 고고학사의 기존 통설에서는 농경혁명이 일어난 뒤 생산력 증가로 계층분화가 이어지고 지배층의 통치수단으로서 사회를 통합하는 종교가 태동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호더가 차탈회위크에서 내놓은 추론은 정반대다. 망자들을 기리는 종교적 제례가 농경에 따른 생산력 증가와 연관되지 않고 평등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신념체계로서 훨씬 이전부터 생겨났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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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을 다루는 고고학사의 기존 통설에서는 농경혁명이 일어난 뒤 생산력 증가로 계층분화가 이어지고 지배층의 통치수단으로서 사회 질서를 통합하는 종교가 태동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언 호더가 차탈회위크에서 내놓은 추론은 정반대다. 망자들을 기리는 종교적 제례가 농경에 따른 생산력 증가와 연관되지 않고 평등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신념체계로서 훨씬 이전부터 생겨났다는 결론이다. 호더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를 사사했다는 답사단의 김종일 서울대 교수는 “유적유물 이면에 있는 당대 사람들의 사회적 정신적 맥락을 살피는 해석의 고고학이 이언로더 학설의 뼈대”라며 “ 평화와 공생을 중시하는 공동체를 이루는데 종교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그의 주장은 인류문명사의 초창기 양상을 규명하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주거 터의 벽화 소재들이 농경 생활이 아니라 과거 수렵채집 시기의 야생동물과 사냥 장면이 주종을 이룬다는 점과 땅을 뜻하는 지모신이 상당수 출토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종교 의식이 농경 과정을 통해 움트지 않았고, 과거 조상들의 수렵, 사냥 생활에 대한 향수와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나톨리아 동남부의 괴베클리테페 유적에서도 농경을 시작하기 전인 1만1000년전의 신전터와 동물문양 새겨진 기둥돌이 90년대 이후 발견되면서 요즘 세계 고고학계에선 농경혁명 이후 종교의 태동, 발전설을 재고해야한다는 주장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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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코니아의 메블라나박물관 앞에서 펼쳐진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 메블라나의 신앙의식인 세마춤 공연 모습. 조법종 우석대 교수 제공
지난 19일 코니아의 메블라나박물관 앞에서 펼쳐진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 메블라나의 신앙의식인 세마춤 공연 모습. 조법종 우석대 교수 제공

유적 인근의 이슬람 고도인 코니아가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 메블라나 수피즘의 발원지였다는 사실은 이런 측면에서 예사롭지 않다. 메블라나 수피즘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시인이자 사상가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가 13세기 모든 계층을 포용하는 박애주의와 신과의 합일을 모색한 신비주의를 표방하며 만든 종파다. 당시 몽골군 침입과 술탄국들 사이의 전란에 시달렸던 아나톨리아 민중에게 수피즘은 평화, 공생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오늘날까지 터키의 대표종파로서 자리잡게 된다. 지난달 20일 밤 루미의 영묘가 자리한 코니아 도심의 메블라나 박물관 앞에서 답사단을 위해 펼쳐진 수피즘 수행자들의 세마춤 의식은 황홀경으로 넘쳐났다. 흰색 치마옷에 고깔모자를 쓴 그들은 오른손으로 하늘을 받들고, 왼손은 땅으로 내리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아지경의 군무를 보여주었다. 이 회전춤과 차탈회위크 옛 삶터에 깃든 화합과 공존, 포용의 정신이 훗날 오스만 제국의 관용적 통치를 떠받치는 내면의 토대가 되었으리라. 코니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