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한 방 안에 틀어박혀 방 안을 채운 물건을 만지고 뒤집고 펼쳤다가 다시 내려놓는 일을 며칠째 반복하다 보니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쓰레기통에 넣으면 쓰레기인데 그냥 두면 쓸모가 생길지도 모를 물건들 천지였다. 방 전체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었다. 방을 버리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나날이 추워지는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건물도 차도 사람도 없는 황량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 곳에 가려면 일단 건물과 사람과 차가 많은 곳을 지나가야만 했다. 도망이란 그런 것이다. 언젠가는 도망에 대해 글을 쓸 것이다. 미워지자 무서워지는 것에 대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에 대해. ‘쓰고 있다’는 말을 해본 지 오래되었다. ‘쓸 것이다’라는 말만 하고 산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내 말을 무척 잘 들어주던 사람이 있었다. 그를 만나며 느꼈다. 사랑은 확실히 ‘하는’ 것이라고. 처음엔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어떤 부분을 마모시키는 것 같았다. 설렘과 호기심의 영토에 익숙함과 권태가 조금씩 스며들던 때였다. 그 사람이 무척 아프게 됐다. 평생 짊어져야 할 병이라고 했다. 나는 그럴듯한 위로를 건네고 도망쳤다. 이성적, 객관적으로는 나를 나쁘다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관적, 감정적으로 나는 나빴다. 나쁜 년이었다. 아무도 내게 손가락질하지 않았지만 온 인류가 내게 눈총을 주는 것 같았다. ‘너와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라는 말로 시작된 관계였다. ‘너와 있지 않으면 나쁜 년이 되는 게 싫어’라는 말로 관계를 끝냈다. 내키지 않은 척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내 아픔을 그의 아픔보다 부풀리기 위해 글을 썼다. 도망친 내게도 네가 모를 고통이 있다는 식으로 썼다. 글을 그런데 써먹었다. 내가 쓴 변명은 여러 사람이 읽었겠지만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낯선 이는 없었다. 없었을 것이다. C에게 말하고 싶었다. 공감이란 상대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꾸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행위 자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랬구나, 그렇구나, 추임새를 넣는 것보다 중요한 건, 거기 그 자리에서 너의 말을 끊지 않고 닥치고 듣고 있는 그 사람 자체라고. 거기 빤히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기지 말고 원래 없는 것을 없다고 시비 걸지 말고, 그냥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라고. 이젠 너를 견딜 수가 없다고, 더는 너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네 곁에 있을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는 같잖은 포즈로 나를 꾸미는 대신,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대신, 나쁜 년이면 나쁜 년으로서 가감 없이 말하고 보여줘야 했다. 내가 솔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만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알았고 모두가 알았다. 모두가 안다는 것을 나만 몰랐을 뿐이다. 물론 사랑했다.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참담했다. 그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했다. 불쌍한 상대를 아프게 할까 봐 우리는 맘껏 울지도 화내지도 못했다. 단 한 번도 개운하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정의 변두리만을 서성거렸다. 그래서 지저분하지 않게 헤어졌지만, 남은 마음이 얼어버린 강처럼 깨져버리지나 않을까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얼어버린 수면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살과 숨 막힘과 먹고 먹힘을 서로 짐작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모른 척했다. 지금쯤 그의 계절에도 봄이 왔을까. 왔다면, 그 마음의 얼음은 얼마나 녹았을까. 녹았다면, 제 마음을 채운 채 얼어버린 그것이 맑은 물이 아니라 비리고 끈적끈적한 핏물이란 것을 그도 알게 되었을까. 알았다면,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미워하고 무서워하며 찾을까. 같이 소리 지르기 위해. 울고 화내고 욕하기 위해. 맘껏 탓하기 위해. 그때의 두려움과 불안을 아는 사람은 나뿐일 테니까. 짧지 않은 시간, 둘만의 과거를 공유했으니까. 사랑과 미움의 교집합이 가장 많은 사이니까. 우린 우리의 이별을 함께 경험했으니까. 아닐까?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의 이별에도 시차가 있었을까? 그땐 계절 단위로 시간이 흘렀다. 수제비 반죽 뜯어내듯 시간을 뭉텅뭉텅 뜯어내는 것만 같았다. 모든 시간이 뜯기고도 한참 후에야 어릿어릿 녹아가던 내 마음에도 핏물이 있었다. 도망친 내게도 그것이 있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은 오히려 맑을까? 나를 깨끗이 잊고 지낼까? 설마 그럴까? 모두를 고뇌에 빠트리고 때가 되면 그 고뇌를 서서히 가져가는 것 또한 시간이라면, 나에게도 그에게도 그런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질 것이었다. 그 사실이 다행스럽고도 아팠다. 내가 그를 지우듯 그도 나를 지우리라는 사실이. 좋은 쪽을 볼 수도 있다. 우리 서로 애틋했으나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49 대 51의 비율일지라도, 나는 하나의 문장을 선택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우주는 분명 아름답다. 아름다움의 총체다. 존재 자체가 거룩하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다. 그는 그 문장을 선택한 것이다. 무자비한 우주에 시선을 고정한 것이다. 그에게 가고 싶다. 가서 말하고 싶다. 무섭다고. 함께 있어 달라고. 그 말을 하려면 일단 홀로 그에게 가야 한다. 1882년,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고흐는 그것을 ‘의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의무가 무서웠다. 온 힘을 다해본 적이 없기에 온 힘을 다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일까. 고흐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하고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기품을.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자세를. 그 기품과 진심은 그림과 삶에 대한 존경과 동경에서 비롯됐으리라고 어림짐작했다. 처절한 상황에서도 기어코 놓지 않던 심장 같은 희망을, 훔쳐서라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잘 안다. 나와 같은 인간은 그것을 손에 쥔다 하더라도 금세 잃고 말리란걸. 희망이나 이해는 손에 쥐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버려지고 뭉개지고 절망하며 형성된 감각의 심지를 한데 뭉쳐 몸속 깊이 심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단번에 육각형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걸까. 자잘한 점을 모아 직선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직선을 잇고 이어서 육각형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그게 바로 나의 일일까. 제목에 Earth가 들어가는 책 따위 원래 없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그 거짓말에 나부터 속아야 했다. 그리고 모두를 속여야 했다. 글은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속고 있음을 영영 잊어서는 안 되겠지.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영영 없으리란 법은 없다. 언젠가는 그 책 위에 냄비를 올려두고 라면을 먹을 것이다. 베고 잘 것이다. 그 책을 다른 책의 독서대로 삼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며 읽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그를 만나야 한다. 만나기 위해 건물과 차와 사람 속에 뒤섞여야 한다. 무서워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다 다시 방을 뛰쳐나와 이른 아침 버스에 홀로 몸을 싣게 되더라도.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