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절박하게, 때로는 무성의하게 책을 찾았다. 방 안의 물건을 하나하나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는 짓을 반복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문장을 써보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그가 미워지자 무서워졌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타닥타닥 찍히더니 지워지지 않았다. 그 문장을 주문처럼 중얼중얼 읊으며 생각했다. 미움이 생기기에 가장 적당한 상태는 상대를 아주 많이 원하는 것. 원하여 갖게 되어 미워질 수도, 원했지만 갖지 못해서 미워질 수도 있지. 하지만 이런 생각은 너무 도식적이고 뻔하잖아. 나는 나의 생각을 비난했다. 다른 걸 생각해보자. 옷장에서 케케묵은 옷을 하나하나 꺼내어 한쪽에 수북이 쌓아놓고 다시 차곡차곡 개켜 넣으며, 미워지자 무서워지는 다른 경우를 궁리했다. 미워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나도 모르게 미워하게 되면 그 감정 자체가 무서울 수도 있다. 혹은 미워하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사람이라서 살인을 저지를 자신이 무서울 수도 있다. 아니면 미워하는 것과 무서워하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감정인데 그냥 그렇게 이어 붙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시시하게 이어가다 그런 내가 웃기고 가소로워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미워지자 무서워졌다는 것. 그건 어디에서 본 것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 문장의 정체를 아는 게 목적이라면 상상하거나 이야기를 꾸밀 필요가 없었다. 그건 내가 아주 잘 아는 감정이니까. 답은 내 안에 있으니까. 나는 미워지면 무서워지는 인간이니까. 홀로 될까 봐. 더 외로워질까 봐. 몇 날 몇 달 물에 만 밥이나 간장에 비빈 밥으로 끼니를 때우게 될까 봐. 입과 귀를 닫고 살까 봐. 문밖으로 나가지 않을까 봐. 봄과 가을을 싫어하고 겨울만 기다리게 될까 봐. 내가 나를 방치하여 다 쓴 형광등처럼 번거롭고도 위험한 존재로 만들고, 그러다 결국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아둔 채 터전을 바꾸기 전까지 잊고 살까 봐. 잊고 살다 잃어버릴까 봐. 굳이 신경 써서 버릴 필요도 없이 그리될까 봐. 그러다 뜻하지 않은 어느 날 거기 그대로 있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까 봐. 그것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여전히 아픈 것도 애써 부정하기도 다 싫은데 다시…… 그렇게 될까 봐.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쓸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흔해빠진 이야기니까.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인 척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도 거짓말도 아닌 어정쩡한 말이 될 테니까. 머릿속에 콕 박혀서 떨어지지 않는 문장을 어서 지우고 책을 찾는 데만 골몰하고 싶었다. 그랬다. 나는 그가 미워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무서웠다. 실은 어젯밤에도 그가 너무 미워서 한숨도 못 자다가, 새벽이 오자마자 말도 없이 그의 방에서 나와버렸다. 어슴푸레한 길에 발을 내딛고 아주 조금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찬란한 아침이었다. 춥고 눈부시고 속이 쓰렸다. 나는 그새 후회만 했다. 나오지 말걸. 그냥 그의 곁에서 잠들걸.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괜찮아’뿐이었다. 그 말을 하느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숨 자고 난 뒤 그의 말간 얼굴을 마주한다면 ‘괜찮아’라고 말할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너무 밉다는 것과 너무 좋다는 것은 반대 의미가 아니니까. 국어사전에는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사전에 두 단어는 유의어에 가까우니까. 너무 좋으니까 밉고 그래서 무서우니까. 무서운 마음에 할 수 있는 말은 ‘괜찮아’뿐이니까. 아침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분함과 슬픔과 후회와 무서움이 뒤섞인 잽이 내 마음을 때려 나는 자꾸 울었다. 정오 넘어서야 건성건성 잠들었다가 햇살도 바람도 끝내주는 오후에 일어나 동네 빨래방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다. 날씨 좋은 주말이라 다들 나들이라도 떠났는지 골목은 더없이 한적하고 고요했다. 겨울 이불을 커다란 세탁기에 구겨 넣고 500원짜리 동전 일곱 개인가 여덟 개를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비닐이 벗겨진 옛날 소파에 앉아 세탁기 속에서 돌돌돌 돌아가는 겨울 이불을 보고, 조그만 단지 속에 보관해두었다가 그 온기를 알아볼 줄 아는…… 그에게 선물하고 싶은 가을 햇살을 보고, 낡은 스웨터의 보풀을 주섬주섬 뜯어내다가, 유리문에 비친 나를 보았다. 기억을 빨아버리고 싶었다. 500원짜리 동전 열다섯 개면 가능하나? 그럼 내게도 다른 냄새가 날까? 그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도 이전 기억에 간섭받지 않을 수 있을까? 가을이란 거 없으면 좋겠다. 바로 겨울이면 좋겠다. 마음 물드는 것도 몸 흔들리는 것도 다 싫다. 귀찮다. 나는 누군가가 너무 미울 때마다 가을이나 봄 같은 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가 미워지자 무서워졌다’라는 문장은 ‘그가 좋아지자 무서워졌다’라는 문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가 좋아지자 미워졌다’라는 문장과도 별 차이 없다. 나는 셋 중에 무슨 문장을 선택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러니 글을 쓴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문장 뒤에 무언가를 감추거나 아예 내가 숨어버리고 싶은데, 문장과 나, 혹은 문장과 내가 감추려는 것의 크기나 모양이 꼭 맞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슷하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써나갈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나와 문장이 너무 다르다. 머릿속에는 육각형 불안이 있는데 글이 되어 나오는 건 직선 아니면 점이다. 그 뒤에 어떻게 숨나. 가느다란 직선 뒤에 대체 무엇을 감출 수 있겠는가.
[최진영 소설 | 0] 7회
최진영 소설 <7화>
- 수정 2019-10-19 20:29
- 등록 2014-11-11 09:30